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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의 시간 - 23. epilogue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코로나 사태가 발발했다. 처음에는 서울에서만 조금 퍼지다가 점점 사그라지는 듯싶었지만 대구에서 집단감염 사례가 발생했고 이 때문에 대구와 가까운 도시인 부산에 있는 우리 병원에도 비상이 걸렸다.


우선 인턴들이 코로나 선별 진료소로 차출되었다. 뭐 이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전에 한 명, 오후에 한 명. 하루에 두명만 선별 진료소에서 검사를 하기 때문에 내 차례는 2주에 한번 올까 말까 한 정도였고 2명 정도의 공백은 나머지 30명의 인턴들이 충분히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부산은 대구와 굉장히 가까운 도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병원에서 근무하는 인턴 동기들 중 상당수는 집이 대구였고 그 친구들 중 대부분이 주말에 대구에 다녀온 죄로 2주간 자가격리를 당해버렸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인턴들 중 3분의 1 가까이가 되었다.  특히 내가 마지막에 돌고 있었던 내과 같은 경우에는 6명 중 절반인 3명이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끔찍한 지옥이 펼쳐졌다.


이 상황에 대해 병원에 항의를 하면서 인턴 인원 재배치를 건의해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정 손이 안되면 레지던트가 합니다'였다. 후..... 어떻게 그러냐고...


 이제 곧 내 윗년차 선생님들이 될 분들이 내 일을 하게 하는 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나는 정말 미친 듯이 열심히 일했다.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도 일이 점점 쌓여가는 신기하고도 끔찍한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밤에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자가격리당한 친구들 몫의 당직까지 서야 했기 때문이다.  인턴 마지막 주에 한 개 밖에 없었던 내 당직은 4개까지 늘었다. 마지막 주에 좀 쉬겠다고 당직을 미리 다 서놨었는데 정말 큰 실수였다. 물론 당직에 대한 보수를 꽤나 짭짤하게 받긴 했지만 추가 보수가 전혀 반갑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시간은 차곡차곡 흘러서 새로운 인턴들이 인계를 받으러 올 시간이 되었다. 문자를 한통 받았다.  '내일 몇 시에 인계받으러 가면 될까요?'라는 내용을 안녕하십니까, 항상 고생이 많으십니다,  죄송하지만, 감사합니다 등의 말들을 사용해서 7줄로 늘여놓은 문자였다. 피식했다. 막 퇴근을 하고 힘들어 죽겠다는 생각을 하며 쓰러져 있던 순간이었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군기가 팍들어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웃은 건 아니었다. 불필요한 미사여구를 보고 비웃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도 이렇게 장문의 문자를 보내었었을까 말이다. 내가 윗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문자를 보내는 걸 볼 때마다 내 인턴 동기들은 도대체 뭐가 그렇게 고맙길래 자꾸 감사합니다를 붙이냐고, 문자를 해야 돼서 문자를 한 건데 왜 죄송합니다를 자꾸 붙이냐고 놀리곤 했지만 나는 '그냥 용건만 툭 말하면 좀 그렇잖아' 하면서 꿋꿋이 이런 식으로 문자를 보냈었다. 확실히 이런 문자를 내가 받아보는 입장이 되니 좀 어색하긴 했다. 하지만 싫다기보다는 작년의 내 모습이 떠올라서 정이 갔고 뭐라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동에서 내가 인계를 해줄 친구를 만났다. 굉장히 어벙해 보이는 친구였다. 나도 맹해 보이는다는 소리를 가끔 듣는데 여러모로 나랑 참 비슷한 친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숙해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인계를 받는 태도는 굉장히 열정적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이것저것 굉장히 꼼꼼하게 물어봤고 내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조그만 수첩에 항상 필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어떻게 하는지 아시겠죠? 한번 직접 해보실래요?"라고 물으면,

아주 잠깐 동안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표정을 굳히고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표정으로,

 "네, 제가 해보겠습니다"를 외치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그리고 또 어벙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시키는 일들은 꽤나 깔끔하게 잘하는 친구였다.


인계를 해주다가 잠시 당직실로 왔다. 새로운 인턴들이 들어오는 시즌이어서 그런지 다들 내년 인턴들 얘기를 하고 있었다.

누가 우리 과 지원자인데 얘는 진짜 애가 괜찮은 거 같다. 우리 과 지원자는 다 별로다. 우리 과는 지원자도 없다. 뭐 대충 이런 얘기들이었다.

그러던 중 내가 인계를 해주던 친구 얘기가 나왔다. 편의상 내가 인계해주었던 이 친구를 A라고 칭하겠다.

"A 만나 봤냐? 우리 과 지원자라 그래서 연락해봤는데 애가 좀 어벙한 거 같아"

"우리 과는 뭐든 빠릿빠릿하게 알아서 잘해야 하는 과여서 어벙하면 힘들 텐데...."


순간 뭔가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옛날 생각이 났다.


6월이었다. 이비인후과 턴을 막 마치고 신나서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으러 갔었다.


한참 잡담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동기 한 명이 내 얘기를 해주었다.


"인사를 안 해도 문제인데, 인사를 너무 많이 하는 것도 안 좋아. 예전에 이비인후과 선생님들이랑 술 마셨을 때 이비인후과 선생님들이 너 방금 인사했는데 30 초 뒤에 다시 마주치면 또 인사한다고 혹시 사회성이 좀 떨어지는 애 아니냐고 나한테 물어봤잖아. 아 물론 내가 너 진짜 일 잘하고 좋은 애라고 말은 해놨어. 담에 이비인후과 선생님들이랑도 같이 술 한잔 하자."


당시에 이비인후과 지원자였던 나는 이 얘기를 듣고 한참 동안 정신을 못 차렸었다. 


단지 조금 더 공손하고 조금 더 열심히 하려고 했을 뿐인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비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정말 우울했었다.


신입 인턴 A의 모습에 내가 겹쳐 보였다. 


아마 그 친구가 어벙해 보였던 이유도 나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걔 내가 인계해줬는데 애가 진짜 괜찮던데. 열심히 하고 이것저것 시키는데 곧잘 하더라고."


"아 그래? 하기야 어벙해 보여도 일 잘하는 애들 많드라."


그 뒤로는 더 열심히 인계를 해주었다.


어느덧 3월 1일이 되어서 그 친구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꽤나 잘해나가는 것 같았다. 뿌듯했다.


인턴생활이란 게 항상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밤을 새우는 날도 있을 것이고, 환자한테 심한 말을 듣는 날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에 절망하는 날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A가 그런 일들에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잘 이겨내기를 빌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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