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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의 시간- 1. 인턴을 해보자

  의대생들은 대부분 진로에 대한 고민을 거의 하지 않는다. 졸업 후 의사 외의 진로가 거의 없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막연한 진로 고민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의대생들에게 졸업을 앞둔 본과 4학년이라는 시간은 낯설고 당혹스러운 시간이다.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미래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해야만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의대생들에게는 의사 외의 진로가 거의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흉부외과 성형외과 등 20여 개가 넘는 전공이 있고 호흡기내과, 항문외과 등의 세부 전공까지 합하면 거의 몇십 개나 되는 서로 다른 전공이 있다. 의사라는 이름의 직업은 하나지만 그 직업 내에서는 수많은 서로 다른 길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의사라고 해도 전문과에 따라서 의사의 삶은 천차만별이다. 암실에 앉아서 영상판독을 하는 영상의학과 전문의와 응급실에서 뛰어다니면서 응급환자를 보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같은 의사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서로 다른 일을 한다. 이 때문에 우리 모두는 "나는 무슨 과를 가야 될까?", "나한테 제일 맞는 과는 무엇인가"등의 고민을 치열하게 한다. 나의 경우에는 1 지망으로 이비인후과를 선택했다. 간단하지만 환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수술들을 많이 하기도 하고 또 외래 진료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술도 하고 싶고 진료도 하고 싶었던 나에게는 정말 매력적인 과였다.       



 여기에 남자 의대생들은 한 가지 고민을 더 해야 한다. 바로 '군대를 다녀올지 아니면 바로 인턴을 시작할지'에 대한 고민이다. 과를 정하는 것은 인턴 초에 해도 되기 때문에 우리 남자 의대생들은 이 고민을 먼저 해결해야만 한다. 이 때문에 오히려 과 선택보다도 군대에 대한 고민에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나 역시도 그랬다.      


군대를 먼저 가는 것과 인턴을 먼저 하는 것은 각각 뚜렷한 장점과 단점이 있다. 나는 결정하기에 앞서 각각의 장단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았다.  

   


 군대를 먼저 가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공중보건의’라는 제도를 통해서 군대를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공중보건의는 의사가 없는 시골에 파견되어서 간단한 진료를 하는 의사를 말하는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근무하고 주말에는 쉰다. 또한 따로 선임이 존재하지 않아서 눈치 주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굉장히 시골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공중보건의는 36개월의 군 생활을 수행해야 한다. 그동안 자기 계발을 통해 능력을 쌓을 수도 있다. 3년의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학생 때 배웠던 의학지식들을 정리할 수도 있고 긴 시간 동안 집중을 유지하면서 일해야 하는 의사에게 꼭 필요한 ‘체력’을 기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군대를 먼저 다녀올 경우 레지던트 수련 후에 바로 이어서 펠로우 수련을 할 수 있다. 수술과의 경우 1년의 인턴 생활과 4년의 레지던트 수련으로는 수술을 집도할 정도의 능력을 쌓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몇 년의 펠로우 수련을 더 받아야 진정한 서젼(surgeon, 수술하는 의사)이 된다. 하지만 레지던트 수련을 받은 후 군대를 다녀와서 펠로우를 하는 경우 군대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레지던트 수련 때 배웠던 것들을 많이 잊어버리기 때문에 펠로우 수련을 받을 때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한다. 때문에 몇몇 수술과에서는 오히려 먼저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을 선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군대를 먼저 가는 것은 장점이 명확한 만큼 단점도 명확하다.      

“한번 편하게 살았던 사람이 다시 열심히 살기는 정말 힘든 일이야”     

 친한 형이 한 말이다. 편하게 근무하던 사람이 인턴과 레지던트의 가혹한 근무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과에서는 군대를 다녀온 사람을 정말 싫어한다. 병원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병원에는 ‘왜 저렇게 까지 싫어하지?’ 싶을 정도로 군대 다녀온 사람들을 기피하는 과들이 존재한다.      



 또 대부분의 의대생들은 인턴을 한 뒤에 군대를 간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다녀온 뒤에 인턴을 할 경우 후배들이 선배 레지던트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리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고 한다.      



   반면에 인턴을 먼저 할 경우에는 동기들과 함께 인턴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힘든 생활을 같이 버틸 동료가 존재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인턴을 먼저 한다면 공중보건의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힘든 '군의관'으로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런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졸업을 앞둔 남자 의대생들은 큰 고민에 빠진다. 나 역시 그랬다.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의대 6년 동안 고생했으니까 군대를 먼저 가서 재충전을 한 다음에 인턴을 하자”

 “그래, 체력도 약한데 군대 가서 체력이라도 키우고 인턴 하자”

 “아. 나 눈치도 없는데 3년 동안 사회생활 좀 하면서 눈치라도 키우고 인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을 거듭할수록 의대 생활에 지쳐 있었던 나의 마음은 군대를 먼저 가는 쪽으로 기울어 갔다. 하지만 막상 군대를 먼저 가기로 하니 다른 것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공중보건의 하면서 편하게 지내다가 그 힘들다는 인턴 일을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었다.     



 의대에 입학한 뒤로는 별로 해본 적 없던 진로에 관한 고민이었기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고민을 해도 결정을 내릴 수 없었고 나는 조금 더 원론적으로 접근하여 질문을 해보았다.     



 나는 왜 인턴이 아니라 군대를 먼저 가고 싶을까?라는 질문이었다. 자기 계발을 하고 싶어서? 아니다. 특별히 배워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체력을 길러서 나중에 인턴생활을 좀 더 잘하려고?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인턴이든 무엇이든 가장 잘 해내는 사람은 결국 체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내가 체력 때문에 군대를 먼저 간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결국 가장 큰 이유는 인턴을 하기가 ‘무서워서’였다. 의대를 준비할 시절부터 인턴의 고단함에 대해서 수없이 들어왔고 실제로 학생 때 실습을 돌면서도 인턴 선생님들의 힘든 모습을 자주 보았던 나는 인턴을 하는 게 너무 무서웠다.     



 그렇다면 왜 군대를 먼저 가는 것 역시 선뜻 선택하지 못했을까? 군대를 다녀와도 결국 인턴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편하게 살다가 갑자기 힘든 생활을 겪는 것은 힘들게 살다가 더 힘들게 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리라.     


 아예 ‘평생 인턴을 안 하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생각까지 가버렸을 때쯤, 산부인과 교수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났다. 의외로 의사가 편하게 살 수 있는 길들은 많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계속해서 편한 길들 만 고르다 보면 정말 편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하지만 몸은 편할지 언정 더 이상 의사라고 하기 힘든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어렵고 힘든 일에 도전하는 것은 그만한 보람과 가치가 있다는 말씀과 함께. 그 말씀들이 불현듯 크게 와 닿았다.


 문득 내가 여기서 인턴을 하기가 무서워서 공중보건의라는 길을 선택한다면 공중보건의가 끝난 뒤에는 인턴을 하기가 더 힘들기 때문에 그때 또다시 다른 더 편한 길로 회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편한 것 덜 힘든 것만을 찾다 보면 어느새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사라고 하기 힘든 그런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중보건의를 선택하는 것이 별로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턴을 하기가 무서워서’ 공중보건의를 선택하는 것은 정말 좋지 못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결정들을 부모님께 맡기고 공부만 했던 내가 처음으로 나만의 의지로 내리는 결정이었다. 그 첫 결정이 두려움 때문에 힘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내리는 결정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1년만 고생해보고 정말 정 못 버티겠으면 그때 조금 더 편한 선택을 해보자.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인턴을 하는 것은 여전히 무섭고 싫었지만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더 이상 의사라고 하기 힘든 사람’이 되는 것만큼 싫지는 않았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기 전에 얼른 인턴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나는 인턴에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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