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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히 May 08. 2024

악마를 보았다.

 - 10. 악마들의 향연_품평회

 품평회란 사전적 의미로 "물건이나 작품의 좋고 나쁨을 평하는 모임"이라고 한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회사는 패션 회사이기 때문에 연간 총 2번 품평회를 진행해 왔다.


 봄, 여름을 뜻하는 S/S시즌(Spring, Summer) 1번, 가을, 겨울을 뜻하는 F/W시즌(Fall, Winter, 혹은 가을을 Autumn이라고 써서 A/W라고도 한다.) 1번, 이렇게 총 2번의 품평회를 진행하는 것이다.


 선배한테 들은 얘기로 예전에 회사가 잘 나갈 때에는 제주도 유명 호텔에서 연예인까지 섭외해서 매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신입사원이었을 때에는 이미 매출이 고꾸라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시절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서울 호텔에서 품평회를 진행했었다. 그 당시 신입사원으로서 첫 품평회는 마치 “지옥”같았다.


 나에게 그렇게 큰 행사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에 긴장감은 더욱 배가되었을 것이다.


 1박 2일 동안 진행되는 품평회에는 전국 각지의 대리점 사장님들이 참석했었고, 참석 인원만 최소 500명 이상이었다. 짧다면 짧은 1박 2일이지만 지옥에서 온 법한 악마들이 그곳엔 존재했었다.


1. 권력의 악마

 이 행사에서는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부사장님이 계셨다. 강단에 올라가서 연설을 하는 모습은 나치 제국의 아돌프 히틀러나, 혹은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을 연상케 했다.


 그분은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불평불만을 해소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에 적극적이고 또한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마음에 안 드는 상품이 있으신가요? 마음에 안 드는 상품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다 잘라버리겠습니다. 영업 담당자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저한테 다 말씀해 주십시오. 다 잘라버리겠습니다."


 비단 품평회에서뿐만 아니라 사무실에서도 "잘라버리겠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직원들의 존경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타인을 짓밟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물론 이는 내가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에 단편적인 시각으로밖에 볼 수 없는 좁은 시야와 두려움의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은 "권력의 악마"였다.


2. 탐욕의 악마

 품평회의 주목적은 판매할 상품들에 대해서 좋고 나쁨을 얘기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는 자리라고 했다.

 

 하지만 이 행사의 취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탐욕의 악마"라고 지칭하고 싶다. 그 사람들은 상품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고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러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대리점 사장님들이었고, 본사의 담당자, 팀장님,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과거의 영광을 얘기하며 자신의 장사 경험을 영웅담처럼 늘어놓았으며, 회사를 위해 투자를 했고 회사는 그에 대한 보답을 해줘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모든 게 연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탐욕의 악마들은 감정기복이 매우 심한 사람들이었다. 마치 아수라 백작인 것 마냥 환하게 웃다가 돌연 화를 내며 자신만의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 사람들은 물량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를 원했고, 하다 못해 옷걸이라든지, 양말이라든지 자그마한 사은품이라도 받아내야겠다는 의지가 강력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팀장님들에게 확답을 받고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내가 본 그 사람들의 미소는 "탐욕의 악마"가 짓는 미소 그 자체였다.


3. 정치의 악마

 품평회는 회사와 관련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하는 큰 행사이다. 회사생활을 하는 회사원이라면 이렇게 큰 행사야말로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자신이 관리해 온 매장의 사장님들과 얼마나 돈독한 관계를 쌓아왔는지, 그 사람들의 입에서 얼마나 많은 칭찬의 얘기가 나오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평판이 달라지는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리더십을 발휘한다거나 빠릿빠릿하게 일처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윗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방법 중 가장 쉬운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남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권력의 악마"가 했듯이 말이다.


 "정치의 악마들" 또한 이 방법을 너무나 잘 아는 듯했다. 이 사람들은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방법을 보고 들으며 자연스레 체득했을 것이다.


 나는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보호세력이 없었고, 제일 만만하고 약한 초식동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회사에서 일을 잘한다고 인정받은들, 그것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한 입에 발린 칭찬이었던 것이다.


 품평회를 진행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짜증 섞인 목소리와 강압적인 목소리, 과시하는 목소리들이었다.


 신입사원인 나를 부림으로써 리더십을 발휘한다고 생각하고, 자신보다 더 윗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행위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회사라는 곳은 단순히 자신이 맡은 바 일을 잘한다고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물론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식동물인 척 적당한 먹잇감이 되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회사에는 "정치의 악마"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입사원으로서의 첫 품평회는 이로써 끝이 났다. 향후에는 실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호텔에서 진행하는 품평회는 볼 수 없었고, 1박 2일의 품평회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여러 악마들과 함께 후배들이 겪지 못했고, 앞으로도 없을 품평회를 끝마쳤다.

이전 09화 신입사원이라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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