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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로빅한 지 2년 됐습니다

by 자몽에이드


나란 인간을 요즘 말하는 MBTI 유형으로 살피자면 I형 인간이다. 주목받는 것을 원하지도 않고 원해본 적도 없다. 태생이 부끄러움이 많은 인간이라서 학창 시절엔 순서대로 지목하는 선생님을 극혐 했다. 오늘이 2일이라고 하면 2번, 12번, 22번, 32, 42번은 어떤 모양이라도 줄줄이 걸렸던 그 시절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차라리 랜덤이 낫지 지목을 기다리는 그 시간은 피가 마르는 공포였다. 이런 내가 한 반을 넘어선 많은 앞에서 발표가 아니라 몸을 움직이라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강사님께 가지도 못하고 쭈뼛대고 있는 나에게 “잘해보자.” 쿨하게 말하고 지나가는데 나는 쿨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았다. 내일부터 에어로빅 나가지 말까. 어디 다쳤다고 말할까. 무릎에 좀 안 좋긴 한 거 같은데. 어른의 생각도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직면하기보다 그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냥 행복하게 운동하게 해 주세요.’ 이 바람이 그렇게 어려웠던가. 평소와 다를 건 없었다. 주 4일 에어로빅 시간을 지켰고, 일주일에 2번은 선발된 팀원들과 2시간 정도 합을 맞추어 본 것 외에는.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 강사님 생각 이상으로 나는 너무 못 따라갔다. 언니들이 당연히 알고 있는 것들도 나는 가르쳐 줘야 알았다. 그러니 나를 교정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기본 스텝은 꼬이고 박자감은 왜 그렇게 없는지 반의 반 박자씩 미세하게 늦어졌다. 오히려 그런 게 더 티가 나더라. 인원 또한 소수 인원이라 각 사람 동작이 너무 잘 보였다. 거울 속의 내가 너무 안쓰러웠다. 선생님도 나를 각오하신 것 같은데 하면 할수록 안되니 언성이 높아지시더라. 친절함은 묻어두고 어찌나 내 이름을 소리치시는지 점점 나는 작아져만 갔다.



이럴수록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는데 나는 쪼그라져만 갔다. 멘탈은 진작에 나갔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운동 나가는 것이 정말 고역이었다. 그래도 팀 언니들 모두 다 나한테 잘해줬다. 강사님께 끝도 없이 혼나는 나에게 다가와 자신들도 혼나면서 배웠다고 걱정 말라고 했다. 팀에게 폐를 끼칠까 봐 부담 가지고 있던 나의 마음까지 그들은 알아줬다. 군대 말로 짠 밥은 무시 못 한다고 나를 진심으로 격려해 주었다. 그들에게 이런 공연이 한두 번이었겠으랴. 연례행사였겠지. 즐겁게 하면 좋고 잘하면 더 좋은 거고. 내가 잘하면 내 동작이 발전해서 좋은 거지 그들은 내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좋은 거였다. 뭐 대단한 곳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 혼자 심각했었다. 언니들을 생각하면 그때도 고마웠고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언니들의 건강한 여유와 유머가 다정해서 살면서 가끔씩 생각났고 그때마다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조금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연습이 쌓여서인지 (아님 강사님이 어느 정도 포기해서인지) 나아지고 있었다. 공연까지 몇 주 안 남아서 연습 시간이 늘어났다. 원래 운동 시간에 2시간을 더해서 3시간 운동을 한지 꽤 되었다. 이렇게 운동을 하는데 근육이 안 탄탄해지면 이상하지. 체력적으로 뒤지고 싶지 않아서 필라테스까지 했으니 이건 뭐 하루 운동량이 어마했다. 공연을 핑계로 제일 좋아진 건 나의 몸 상태였던 것 같다. 다행히 지치지 않고 건강하게 잘 따라가고 있었다. 팀 수준에 얼추 맞춰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자신감도 조금 올라왔다. 주민자치센터에서 옷을 맞춰줬다. 지방 소도시에서 살다 보면 이런 맛이 있다. 정겹다고나 할까. 정통 에어로빅복일까봐 걱정했는데 줌바 스타일로 센스 있게 잘 맞춘 거 같다. 옷을 입으니 설렐 그날이 느껴졌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럴 일은 아니었는데 그럴 일이 벌어졌다. 나와는 상관없을 그 일이 나의 영역에 들어와 꽤 큰 영향력을 보여줬다. 마치 너도 사회의 일원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름도 생소한 전염병이 우리나라 돼지 농가에서 발견되었다. 경기 북부에서 순식간에 빠르게 출몰된 이 전염병이 얼마나 위험한지 지역 이동을 통제했다. 곳곳에서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도로 방역을 시작했고 지역 축제와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그렇게 우리가 준비한 공연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은 돼지에게만 국한된 전염병이었지. 그때까지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오고 있다는 것을. 모여서 함께 호흡을 공유하며 운동했던 그 평범함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던지 정부에서 모임을 제한하는 상황이 올 거란 것을 말이다. 그렇게 2019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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