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놀이치료 중단하려고요.”
지유의 놀이치료 마지막 날이었다.
“어머님, 왜 갑자기 놀이치료를 끝내시게 되었어요?”
상담사의 질문에,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뜨거운 8월의 정오. 여름방학 특강으로 미술학원을 다닌 지유와 친구 하은이, 그리고 하은 엄마와 함께 만난 날이었다. 지유는 친구 하은이와 여름방학을 함께했다. 하은이는 고마운 친구다. 지유가 불안에 휩싸여, 엄마만 찾고 친구를 외면했던 기간에도 하은이는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개학하고 수개월이 지나 지유가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지만, 주위 아이들은 곁을 주지 않았다. 그때 지유에게 하은이가 있어 주었다. 하은이의 존재만으로 지유는 다시 학교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직장에 다니는 하은 엄마를 대신해, 방학동안 두 아이의 학원과 놀이터, 간식 먹기 등의 일정을 내가 혼자 해왔다. 나로서는 그저 아이에게 친구가 생긴 것만으로도 다행이었기 때문에, 하나도 힘이 들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하은 엄마가 휴가를 내고 학원에 데리러 온 것이다. 우리 넷은 처음으로 함께 만났다. 아이 둘에 어른 하나였던 어색한 조합에서, 드디어 어른이 둘이 된 날.
우리는 맥도날드로 향했다. 아이들은 그저 신이 났다. 특히 지유는 평소 친구 앞에서 엄마를 놀리는 걸 좋아하는데, 다른 때보다 짓궂게 굴기 시작했다. 아마도, 친구 엄마 앞에서는 엄마가 긴장한다는 것을 알고 더욱 장난을 치는 모양이었다. 지유는 학원에서 만들어온 모형 작품과 캔버스를 들어달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휴지를 가져다 달라는 둥, 물을 떠 오라는 둥 평소보다 이상하리만치 요구했다.
지유는 감정의 고조가 높아지면, 감정 흐름의 기복도 커지면서 폭발할 때가 있다. 친구를 만나 즐거움으로 인한 흥분이 강할수록, 잘못될 것에 대한 불안도 함께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그랬던 경험이 있었기에, 걱정이 되었다. 우리 네 사람의 화목한 시간만을 바랐다. 그러나 우려했던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또래에 비해 의젓해 보인다고 하은이를 칭찬하자, 속이 상한 지유가 화를 낸 것이었다.
“엄마, 친구 앞에서 그렇게 딸을 비교하면 돼? 그렇게 아무 말이나 하면 어떡해? 창피하게!”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하은 엄마가 겨우 말을 이었다.
“와, 지유 무섭네. 무서운 딸이네.”
난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내 앞에 조용히 앉아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햄버거를 먹는 하은이와 하은 엄마의 모습이 이상적이면서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범하지만, 우린 가질 수 없는 것. 왜 우린 저렇게 되지 못하는 걸까. 아이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는 없는 걸까. 언제라도 터질지 모를 활화산을 대하듯 지유 눈치를 봐야만 하는 일상이 갑자기 피곤하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 지유를 꾸짖었다.
“지유야, 아까 네가 한 말은 잘못됐어. 어른에게 버릇없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야. 엄마한테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엄마가 편해도 그러면 안 돼.”
“알았어. 병원 가서 고칠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다시 한번 되물었다.
“뭐라고?”
“병원 가서 고친다고. 잘못한 거 병원 가면 다 고칠 수 있잖아.”
쿵. 눈앞이 흐려지고 가슴이 무너진다. 그동안 상담을 받고, 놀이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다니는 것을 아이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걸까. 혹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예의나 규범의 문제가 아닌, 고쳐야 할 병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자신을 환자라고 규정하고 있던 걸까. 생각해 보니, 지유는 이전에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놀이치료 가기 싫어. 피곤하단 말이야. 하루에 학원을 몇 개를 다니는 거야?”
“놀이치료는 학원이 아니잖아.”
“그럼, 여기는 어디야? 학원이야? 병원이야?”
“상담센터지.”
“상담센터라는 말은 말고, 학원이야, 병원이냐고.”
그렇다. 지유에게 놀이치료는 모르는 무언가를 배우는 학원, 혹은 몸의 어딘가가 잘못되어 아픈 것을 고치는 병원인 것이다. 아이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더 이상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방식은 통하지 않는 나이다. 최대한 솔직하게 설명하려 노력했지만, 아홉 살 아이가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에게도 다른 친구들이 학원에 다니기 바쁠 때, 놀이치료를 가야하는 자신의 처지가 보였을 것이다. 이대로 소아신경정신과 병원을 계속 다녀야 하는 것일까.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건, 아이를 위한 걸까, 나를 위한 걸까. 지유는 지유의 모습 그대로 자라나는데, 내가 개입한 것은 아닐까.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8월의 뙤약볕 아래, 여름방학의 한가운데 속에,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셨군요. 여기 다니는 아이들 대부분이 병원으로 인지하고 오고 있기는 해요. 그래도 다니다 보면, 좋아하거든요. 놀이 치료하면서 보드게임도 하고, 선생님이랑 친해지고 하니까요.”
부드럽게 웃으며 건네는 상담사의 말이 들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병원으로 알고 오는데, 좋아한다니. 병원은 어른이라도 오기 싫은 곳이 아닌가. 나만 이해를 못 하고 있거나, 상담사가 혼자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여전히 헤매인다. 지유에게 가장 좋은 방편이 무엇일지. 약을 계속 먹는 것이 괜찮은지. 학원 대신 병원에 데려오는 것이 맞는 건지. 약간은 불안에 휩싸인 지유의 모습은 원래의 모습이었는지, 지금 잠깐 힘들어서 된 모습인 건지. 지유는 고쳐야 할 부분이 있는 아이인 걸까. 있는 그대로 보아주어야 할 아이인 걸까. 알 것 같다가도 한 번씩 혼돈에 휩싸이곤 한다.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할 고민을 가슴 속에 한 움큼 품고 산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담당의가 매일 보는 나만큼 지유에 대해 알고 있을까? 일주일에 한 시간 만나는 상담사가 지유의 마음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우린 지금 맞는 방향으로 치료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상담이 필요한 건 나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아이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아이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벅찼던 것은 아닌지. 어쩌면, 보통의 어린이 모습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사랑, 애정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그에 따른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등장하는 대사다. 과연, 나는 지금까지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 속에 얼마나 많은 내가 있었는지, 그 속에 당신이 있기는 했는지.
지유를 바라본다. 지유의 눈을 본다. 지유의 얼굴은 9살의 얼굴에서 7살의 얼굴로, 점차 5살, 4살의 얼굴로 보인다. 조금 더 가본다. 아기 때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그때 나는 이 아이를 어떻게 바라봤던가. 나는 이 아이를 예의 바르다고 사랑했던가. 숙제를 잘해서 사랑했던가. 말을 예쁘게 한다고 사랑했던가. 사랑의 이유가 있었나.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를, 생명체로서 사랑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