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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재 Oct 21. 2024

미완의 동화책 주인공을 위해

엄마의 편지 2

지유야, 오늘이 너의 생일이네. 여덟 번째 맞는 생일. 축하해. 오늘 아침, 식구들을 둘러보며 아무도 네게 카드를 주지 않느냐고 물었지. 이걸 생일 카드라고 해야 할까, 카드보다는 할 말이 많을 것 같아 편지를 써.     


넌 내게 특별한 아이야. 부모에게 자식은 누구나 특별하겠지만 말이야. 태어날 때부터 눈빛이 반짝거리는 아기였지. 네 사진을 본 사람들은 모두 네 눈빛을 보고, 머리가 좋을 것 같다는 둥,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것 같다는 둥, 저마다 이야기들을 풀어놓았지. 사실 난 아무 상관 없었어. 네가 머리가 좋든지, 아니든지, 큰 인물이 되든지, 평범한 인물이 되든지 말이야(써놓고 보니, 평범한 인물이 뭔지도 잘 모르겠구나.) 아무튼 그때 난 널 보자마자 너라는 사람 그 자체와 사랑에 빠졌으니까. 네가 어떻게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아.     


어떻게 된 일일까. 어느 날부터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말하는 너의 그 눈빛이 보이기 시작했어. 내가 봐도 유난히 빛이 나는 네 눈빛. 별빛이 흐르는 듯한 너의 눈망울은 보통의 말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었어. 발끝을 딛고 서서 나를 올려다보던 야무진 눈, 유치원에서 있었던 재미난 일을 신이 나서 이야기하던 눈, 상상의 나래에 빠져 꿈꾸는 듯한 눈, 새로 배운 노래를 부를 때의 눈, 이른 아침 고요히 책을 읽어 내려가는 눈. 그때였어. 이 아이에겐 무언가 있겠구나. 내겐 없는 샛별처럼 반짝이는 미래가, 끝없는 바다처럼 펼쳐질 가능성이, 무지개를 꿈꾸는 듯한 상상력이. 무엇이든 하겠구나, 나와는 달리. 다행이다. 나비처럼 가벼운 날갯짓만으로도 훨훨 멀리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내가 도와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일까. 네가 힘들기 시작했던 게. 아무래도 유치원생이 초등학생이 되는 것은 쉽지 않겠지. 사람마다 기질과 성향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초등학생은 이래야 한다, 옆집 아이는 저렇게 잘하는데, 이런 생각이 엄마에게 있었나 봐. 아무래도 너에게 거는 기대도 한몫했던 것 같기도 해. 너는 특별한 아이였으니까. 반짝이는 눈을 가진, 총명한 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초등학교에서도 잘할 거라고, 잘해야만 한다고, 짐짓 무거운 마음이 되었던 것 같아. 아마 네게도 전해졌겠지. 엄마의 기대, 부담, 원망.     


정작 초등학교에 입학한 건 너인데, 나는 나 힘든 것만 생각했어. 1시면 하교하는 널 위해 무슨 일이 생겨도, 학교 앞으로 뛰어가야 했지. 1시만 되면, 신데렐라처럼 나의 모든 게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어. 1시만 되면, 글을 쓰고, 책을 쓰고,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던 시간이 토막 나버렸지. 그게 너무 안타까웠어. 놀기만 해도 괜찮았던 유아에서 공부란 것도 해야 하는 학생으로 탈바꿈해야 했던 너의 고통을 마주 볼 틈이 없었지. 나를 안타까워하느라 너를 놓친 거야.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모든 게 무너지고 스러진 뒤에야, 그제야 내게 문제가 있었다는 걸, 욕심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늦었지만 말이야.     


지유야, 네가 놀이치료를 하면서 경험했던 상담이란 걸, 엄마도 받아본 적이 있어. 네가 일곱 살 무렵, 동생이 두 살쯤 되었을 때였다. 끝을 알 수 없는 깜깜한 바다에 침잠하는 듯한 슬픔과 자신에 대한 미움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지. 설거지하다가 울고, 전화 통화 하다가 울고, 화장실에서 세수하다가 울고. 그땐 엄마 몸속에 수분이 너무 많아 쏟아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 내가 내 속에 잠겨버릴까 무서웠단다.     


우울증이 있는 것 같아 상담센터를 찾아갔어. 상담사와 처음 만난 날, 엄마는 또 울었단다. 왜 울었냐고? 또 슬퍼서 울었냐고? 아니야, 처음으로 엄마 자신에 대해 알게 되어 울었단다. 그날은 첫날이라, 상담사에게 엄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날이었어. 어린 시절과 자라온 과정, 가족, 걱정거리, 갖고 있던 꿈, 자신에 대한 생각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지. 이야기를 막 마쳤을 때, 상담사가 엄마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니?     


“참, 착한 딸이었네요.”     


그냥, 이 말뿐이었단다. 착한 딸이었다고.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나더구나. 왜 그랬을까. 모르겠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 자체를 인정하고 토닥여주는 것 같았어. 그리고 안 그랬어도 괜찮다고. 착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를 위해서 살지 않아도 괜찮고, 이제는 너 자신을 위해서 살아도 된다고. 이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한마디의 말 너머로 이 모든 말이 들리는 기분이었어. 그래서 눈물이 났나 봐.     


그때 느꼈던 울림을 네게 전하고 싶다. 네 생일을 맞아 엄마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줘. 미역국을 끓여주고, 친구들을 불러 생일 파티를 해주고, 근사한 선물을 사주는 엄마가, 어쩌면 너에게 더 필요할지 모르겠네. 아마도 십 년쯤 지나 읽으면 조금은 날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지유야, 넌 착한 딸일 필요는 없어.

착한 어린이이지 않아도 된다. 

착한 학생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너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야. 지금의 너는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엮은 동화책 속 한 장면에 서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책. 부끄러워 친구를 못 사귀고, 산만하여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부주의하여 필통과 물병을 잃어버리고, 무섭다고 등교 거부를 하는 모습도 괜찮아. 주인공에겐 언제나 위기가 찾아오는 법이니까.     


기쁨이고 행복인 지유야, 8년 전 오늘 내게 와주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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