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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재 Oct 17. 2024

폭우가 지나간 자리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만 하고 섣불리 묻지 못했다. 잘못 물었다가 아이가 화를 낼지, 눈물을 터뜨릴지, 혹은 아무 말도 안 해줄지 모르겠다. 무엇이든 아이의 그런 반응은 내게도 상처다. 괜히 뾰족한 말들만 오가다가 서로의 마음을 긁은 날들이 많았다. 이제 나는 먼저 묻지 않기로 했다. 그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한다. 자세히 바라보면 여전히 통통한 볼살과 여린 눈매, 조막만 한 코가 귀엽다. 그렇게 바라보는데, 지유가 먼저 말을 꺼낸다.      


“엄마, 오늘 진짜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 수업 시간에 어떤 애들이 나보고 열심히 안 한다고 그랬어.”

“그래? 그 애들이 왜 그랬지? 무슨 일 있었어?”

“몰라... 으흑흑흑.”     


지유는 울음을 터뜨렸다. 집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이대로 집에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우리는 차에 올라탔고, 가까운 공원으로 향했다. 초록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이야기를 나누자. 단풍이 들기 시작한 숲을 바라보면, 아이 마음도 열릴 것이다.     


그동안 아이 마음만 건강하길 바라며, 놀이치료, 수영, 숲 체험, 캠핑, 등산, 여행을 다녔다. 현장학습까지 활용해 가며 평일에도 여행을 갔다. 아이가 학교를 안 가려는 판에, 받아쓰기가 대수랴, 구구단이 대수랴. 이런 마음으로 일 년을 보냈다. 그동안 지유는 마음이 조금씩 단단해져 갔다. 단짝 친구도 생겼고, 가끔은 그 친구와 등굣길을 함께 하기도 했다. 불안이 가라앉으니, 일상이 되돌아오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게 괜찮아지는 줄 알았다. 학교생활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초등학교에 들어오니 선행학습은 기본이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를 잘 따르는 모범생이었다. 수업 시간에 튀는 행동을 하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숙제를 해오는 것은 기본이고, 시험을 봐도 다 맞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선생님의 지시에 빠르게 응하지 못하고, 과제 수행도 늦고, 시험도 잘 보지 못하는 지유는 튀는 아이가 되었다. 이곳이 학군지이기 때문에 생긴 기현상이었다.      


“지유야, 다른 친구들 얘기 신경 쓰지 마. 서로 잘 알지 못하면서 그냥 하는 말이야. 그 친구는 네가 어떤 식으로 열심히 하는지 잘 모르잖아. 그냥 겉으로만 보고 하는 말이지.”     


그날 저녁, 지유의 가방에서 구겨진 수학 시험지를 보았다. 알고 보니, 학교에서 수학 시험을 보고 온 날이었다. 지유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려왔다. 구구단만 외우면 풀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구구단은 여름 방학부터 계속 외우라고 해왔던 것이었다. 미루기만 하다가 사달이 났다. 학교 진도까지 늦고 나서야 발등 위에 떨어진 불이 보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지유야, 구구단은 피할 수가 없어. 꼭 외워야 해.”     


여기서 끝내야 했는데, 잔소리는 한마디가 나오면 꼭 끝장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나 보다. 잔소리는 제 무대를 만난 듯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건 아름다운 무용수의 춤이라기보다, 칼을 휘두르며 추는 무당의 춤이었다.     


“지유야, 너 지금부터 이렇게 공부 안 하면, 대학도 못 가. 대학 못 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네가 하고 싶은 꿈은 하나도 못 이루는 거야.”     


지유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깨는 움츠러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이 없다. 잔소리는 눈앞의 현장이 어떠한지 신경도 쓰지 못하고 계속됐다.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혓바닥의 춤 놀림은 신내림 받은 무당들이 그렇듯 무아지경의 경지에 올랐다.     


“지유야, 너 요새 하은이 말고 다른 친구하고도 얘기하니? 두루두루 잘 지내야 해. 지유야 좀 더 열심히 살아. 친구도 열심히 사귀고, 공부도 하기 싫은 과목도 열심히 하고.”     


아아아악. 

지유의 울음 섞인 외마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구구단 이야기에서 왜 친구 이야기가 나오는 건가. 나도 모르게 아이를 아프게 할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들었던 열심히 안 한다는 말을 내가 다시 하고 있었다. 이보다 교묘하고 비열한 폭력이 있을 수가 있나. 

점심에는 아이를 위로하던 사람이 저녁에는 아이를 공격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이중성을 마주하니 신물이 난다. 나는 무엇이 부족한 걸까.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같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지난여름, 폭우에 붕괴되었던 개천 길을 걸었던 날이 떠올랐다. 집 앞 개천 길은 가장 좋아하는 산책 코스다. 한동안은 산책로의 복구를 위해 진입 금지 테이프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맑은 날이 계속되던 끝에 산책로가 개방됐다. 아직 산책로를 찾는 사람이 없어 혼자 걸었다. 걷는 데 문제는 없었지만, 폭우의 흔적을 감출 수는 없었다. 침수되었던 곳, 부서진 곳, 망가진 것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거센 물살에 휩쓸렸던 물풀은 헝클어진 여자의 머리처럼 한 방향으로 휘어져 있었다. 보행로는 부서진 곳이 군데군데 보였다. 아스팔트가 뜯겨 지면서 그 안의 흙은 무참히 파헤쳐졌다. 누군가 거친 손길로 산책로를 찢고 뜯어낸 것 같았다. 평소라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어야 할 보도블록의 이음새들이 맞물리지 못하고 어긋났다.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고개를 들어보니, 천변의 나무들이 부러지거나 휘어져 있다. 무겁고 튼튼한, 곧은, 돌덩어리와 콘크리트와 나무와 각종 쇳덩어리가 종잇장처럼 가볍게 찢긴 모습이 낯설었다. 내가 살던 동네지만, 생경한 풍경이었다.      


폭우가 내리면서 아름다웠던 개천의 산책로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복구되고 있지만, 여전히 산책로에 남은 상흔들은 당시에 얼마나 무참하게 망가졌었는지를 가늠하게 했다. 산책로는 사람에겐 단순히 걷기 좋은 길, 통행을 위한 길이지만, 그곳에서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살던 동식물에게는 생태계의 하나였다. 갑작스러운 여름비는 생태계를 부숴버렸다. 갈겨니 같은 민물고기와 개구리, 장구벌레, 물방개, 개미 같은 곤충도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잃었다. 한 번씩 이곳을 찾던 왜가리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어디로 떠나간 걸까.      


폭우 이후 높아진 습도 때문일까. 개천가의 모든 식물이 내뿜는 거친 숨결이 피부로 느껴졌다. 휩쓸려 오는 물살에도 피하지 못하고 견뎌내야 했던 나무와 수생식물은 그대로 모든 위협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에겐 상처만이 남았다. 계단 옆엔 누군가의 운동화 한쪽이 흙이 묻은 채 떨어져 있었다. 빗물에 휩쓸려 온 것일까. 왜 한 짝뿐일까. 운동화 주인에겐 그날 무슨 일이 생겼을까. 나머지 한 짝의 운동화만 신고 집에 갔을까.     


개천 길을 산책하던 그날, 무언가 잃어버렸던 감각이 깨어났다. 폐허를 마주했을 때, 거대한 자연을 바라볼 때 드는 감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것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무심히 사람들에게 밟히는 아스팔트 사이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왕바랭이를 발견했을 때 드는 생명의 숭고함. 전쟁으로 무너져 내린 도시에서도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을 볼 때와 같은 경이감.     


그날 내가 개천 길을 산책하며 되찾았던 건,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지냈던, 살아있는 생명을 마주할 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잊고 살았다. 아이만 치료된다면 못할 것이 없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사소한 건 잊고 살았다. 빨리 이전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랐다. 어쩌면 아팠던 만큼, 힘들었던 만큼 보상을 바라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욕심으로 자식을 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앞에는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증거가 되는 아이가 있다. 아이는 이제 막 전쟁을 겪고 나와 몸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다. 폭우가 막 지나가고 난 뒤의 개천과 같은 모습이다. 복구가 되어 통행은 가능하지만, 아직 거센 물살이 훑고 지나가면서 들쑤셔진 속살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이는 매일 자란다. 아스팔트도 뚫을 만큼의 생명력을 가진 왕바랭이처럼.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만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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