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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재 Oct 16. 2024

나에겐 더 많은 엄마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저기... 괜찮아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     


서연 엄마를 만난 건, 어느 오후 지유가 영어학원 버스를 타지 않겠다고 울던 날이었다. 그날, 지유는 이전엔 타던 영어학원 셔틀버스를 타기 싫어했다. 무섭다는 이유였다. 이전에 다니던 학원보다 버스 크기가 커서일까, 셔틀 도우미 선생님이 무서워서일까, 단순히 학원이 가기 싫어서일까. 여러 추측을 해봐도 알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아무렇지 않게 버스를 타는 것 같은데, 지유는 왜 그런 걸까. 지유는 셔틀 승차 장소에서 악을 쓰고 울며 소리를 질렀다.

“엄마! 무서워, 타기 싫어! 엄마. 버스 안 탈래!!”

버스가 타기 싫어, 떼를 쓰는 거로 생각한 나는 억지로 지유를 태웠다. 도우미 선생님과 내 손에 등이 떠밀리다시피 버스에 올라탄 지유는 울면서 소리를 질렀고, 버스는 무심히 출발했다.      


지유의 불안한 마음과 그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공포와 두려움을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단호하게 대처해야 다음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때 내게 말을 걸어준 사람이 서연 엄마다. 젖은 수건처럼 너덜너덜해진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괜찮냐고 물어주었다. 우리는 길에 선 채로 30분을 대화했다. 처음 보는 내게 그녀는 “우리 첫째하고 똑같아서 지나갈 수가 없었네요.”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심리상담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첫째 아이도 엄마와의 분리 불안이 있다고 했다. 서연이도 작년에 학교에 가는 것을 무서워해서, 놀이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학원 버스를 타기 어려워한다고 했다.     


서연 엄마와 나,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았다. 두 아이 모두 예민한 성향이라는 것, 엄마들은 수용적인 성향의 양육 방식을 가진 것, 방학 동안 아이와 엄마가 긴 시간을 보낸 후에 학교에 갔을 때 아이의 불안이 높아졌다는 것.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용감하고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경험한 것, 느낀 것들을 내게 나누어주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종종 만났고, 그녀와 만나면서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아이를 점차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의 나는 지유를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테레오 타입의 아이를 머릿속에 그려놓고, 그 모습만을 정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하는 지유를 보며 슬퍼했다. 슬픔과 우울에 잠겨 괴로워만 할 뿐, 아이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런 내게 서연 엄마는 선물 같은 사람이었다.     


아이가 멀쩡할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밝고 건강할 때는 눈앞의 내 아이만 보였다. 내 아이가 너무 예뻐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엔 다양한 아이들이 있고, 다양한 삶의 모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조금씩은 아프고 불편한 곳이 있다는 것을. 어떤 아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라야만 한다는 것도, 그것이 그 아이들의 특별함이 되어준다는 것도. 다양성을 인정하자, 시야가 넓어졌다. 그때부터 내겐 다양한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재작년 가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 가을에 나는 둘째 아이에게 자폐 증상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나는 가장 슬픈 가을을 보냈다. 그 말을 들은 날부터 나는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으며, 하루 종일 흐르는 눈물만 닦으며 지냈다. 아이에 대해 생각할 때는 물론이고 세수를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와 수돗물과 흐르는 눈물이 섞여 얼굴을 닦다가 결국 주저앉아 한없이 울던 날도 있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상투적인 표현은 나의 일상이 무너진다는 구체적인 경험이 되었다.



위의 글은 함께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는 글방 동료 승란의 글이다. 그녀는 소프라노이자, 작곡가이자,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마감을 놓친 적이 한 번도 없는 승란은 글방에서 가장 먼저 글을 제출하는 성실한 사람이다. 초롱초롱한 눈빛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가진 그녀는 아픔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사람이었다. 글을 읽기 전까지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승란은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청각이 예민한 아이의 특성을 알아채고, 일찌감치 피아노를 가르쳤다. 음악의 감응력은 아이에게 의사소통의 즐거움을 알게 했다. 승란의 노력은 괴로움을 이겨내고 아이를 특별하게 키울 수 있게 했다.     


지유와 같은 반인 재희 엄마 역시, 내게 깨달음을 준 사람이다. 재희는 발달 장애가 있는 아이로, 같은 나이지만 5살 지능을 가진 아이다. 알아서 교실을 찾아가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재희는 등굣길에 교실까지 데려다줘야 한다. 다른 이유지만, 교실까지 지유를 데려다주는 동안, 나는 매일 그 시간이 괴로웠다. 오늘은 잘 들어갈지 어떨지 불안했고,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어떤 시선들을 걱정했다. 재희 엄마는 달랐다. 재희를 등교시키면서 바라본 아침 학교의 모습을 엄마들에게 알려주곤 했다. 가끔은 먼발치에서 바라본 교실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언뜻 유쾌해 보이는 그녀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처음 재희 엄마를 만난 날, 왠지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입을 떼느라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우려와 달리, 재희 엄마는 대화를 주도할 줄 아는 활기찬 사람이었다. 큰 목소리와 특유의 웃음소리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재치 있는 입담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다 보니, 누구의 엄마였는지는 어느새 잊고 있었다. 재희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이의 장애는 익숙함을 넘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재희 외에도 두 명의 자녀가 더 있는 그녀에게, 재희는 다른 자녀들과 똑같이 귀엽고 말썽꾸러기인 한 명의 아이일 뿐으로 보였다. 아이의 어려움을 하나의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저마다의 어려움을 갖고 있었다. 동병상련으로 보여서였을까. 사람들은 내게 자신의 아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반 대표 어머님의 첫째 아이도, 글쓰기 동아리에서 만난 여성의 둘째 아이도, 수영 학원에서 함께 기다리곤 하는 엄마의 아이도, 친구 재준 씨의 아이도, 남편과 함께 일하는 회계사 님의 아이도 비슷했다. 아이가 예민한 기질을 가졌고, 초등학교에 들어와서 불안이 커졌다고 했다. 자꾸만 늘어가는 심리상담센터 간판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이해가 됐다. 밖에서 어울리며 놀아야 할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만 오가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귀로만 듣는 것과 내가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길가에서 휴대 전화만 바라보고 있는 어린이들의 마음속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방학이 지난 후 갑작스런 불안으로 학교를 혼자 못 가게 된 서연이를 적극적으로 치료를 해온 서연 엄마, 삼 형제 중 막내가 지적 장애 판단을 받아 매일 등굣길을 함께하지만, 활기차게 생활하는 재희 엄마, 아이가 자폐 증상을 보였지만, 음악으로 의사소통을 이끌어 내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운 승란씨, 영어학원 입구에서 수업 듣기 싫다고 악을 쓰며 우는 어느 아이의 엄마. 그리고 코로나 시기에 입학해서 지금까지 마스크 없이는 학교를 가지 않는 아이들.      


다행이다. 다양한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의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육아 서적 속 이야기와는 달랐다. 직접 체험한 경험과 증언은 수렁 속에 빠져 있던 나를 꺼내줬다. 단순한 시선과 편견으로 아이를 바라보던 나를 구해줬다. 잘될 때는 나만 잘난 줄 알고 살던 나를 일깨워줬다. 나에겐 더 많은 엄마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아름답지 않아도 솔직한 이야기, 교훈적이지 않아도 살아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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