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쏟아지는 여름 오후.
날씨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게 어른의 일만은 아닌가 보다. 가랑비 내리던 아침에는 장화 신고 찰박거리며 신나 하던 아이가 하교하는 오후에 장대비가 내리니 우울해했다. 오늘은 지유가 놀이치료를 받는 날이어서, 함께 차를 타고 소아 상담센터로 향했다. 쏟아져 내리는 여름비가 시원하기보다는 처량하게 했다. 놀이터에 갔어야 할 아이를 놀이치료에 데려가는 중인 건 아닌지, 언제까지 여기를 다녀야 하는 건지. 한숨만 나온다.
놀이치료를 시작한 지 이제 3개월. 드라마틱한 효과를 기대할 만한 기간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회기당 내는 적지 않는 액수를 생각하면 자꾸만 결과를 알고 싶은 마음이 된다. 사실 금액의 문제 때문은 아니다. 매주 가는 길이지만, 이 길 위에서는 늘 같은 마음이다. 어서 빨리 차도가 보여, 이제 더 이상 병원을 찾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소아과, 피부과, 정형외과와 달리, 신경정신과는 아픈 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날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다 나은 것 같다가도, 또 어느 날은 작은 일이 발생한 것만으로도 모든 게 무너져 내릴 만큼 심각해지기도 한 것이다.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아이는 소아 상담센터로 놀이치료를 하러 다닌다. 숨길 것도 없지만, 부러 드러내고 싶지는 않은 사실이다. 지유는 이런 내 마음을 알까. 혹여라도 아이에게 내 마음을 들킬까, 두렵기도 하다. 자신에게 문제가 생겨 병원에 다니고 있으며, 그것을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되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할까 봐, 나조차도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의식했다. 다행히도 지유는 크게 개의치 않아 보였다.
어느 날, 지유는 학교에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오늘 짝꿍이랑 싸웠어.”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짝꿍이 자기가 스트레스 많이 받는대. 그래서 나도 많이 받는다고 그랬더니, 자기가 더 많이 받는다잖아!”
“그랬어?”
“응. 내가 더 심한데! 그래서 내가 나는 놀이치료도 갈 정도로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고 말했어.”
“......”
그때 난 지유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바보 같이, 난 조그맣게 말했다.
“지유야, 놀이치료 가는 거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말했을까? 놀이치료 다니는 아이를 안 다니는 아이와 비교하여 부끄럽게 여기고 있던 걸까? 혹여라도 놀이치료 다니는 지유를 아이들이 다른 시선으로 볼까 두려웠던 걸까? 정작 아이들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비는 계속 쏟아져 내리고, 지유는 기분이 안 좋은지 연신 울상이었다.
“지유야, 놀이치료 선생님은 뭐든지 다 들어주시니까, 선생님께 우울한 마음이나 털어놓고 싶은 것들 다 얘기해도 돼.”
“그럼, 지금부터 얘기해야겠다.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나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빠가 엄마를 때렸다. 아빠가 엄마를 버렸다. 동생이 죽었다...”
지유는 온갖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죽음, 폭력, 유기, 상처 같은 단어들을. 평소에 쓰지 않던, 들어본 적 없던 말들이었다. 충격으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거센 빗줄기는 유리창에 부딪히며 부서지고, 내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들은 내게 날아와 부딪쳤다. 차 안에 앉은 우리는 젖지 않고 안온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너덜너덜하게 적셔졌다. 왜 너는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걸까. 더 이상 이런 도움 되지 않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네 기분이 안 좋으려니 여기기로 한다. 아무 말 없이 Celine Dion의 <The Power of love>를 틀었다. 가사가 내 것 같았다. Whenever you reach for me. I’ll do all that I can. 사랑에 남자, 여자만 있으라는 법이 있으랴. 옆자리에 앉아 화가 난 듯 보이는 아이의 옆얼굴을 측은하게 바라봤다.
5분 늦게 도착한 상담센터 로비는 한산했다. 로비의 대기 좌석에는 한 명의 여자가 앉아 있고, 또 다른 자리에는 한 개의 가방이 놓여 있었다. 두 명의 아이가 상담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지유도 서둘러 상담실로 들여보낸 후, 여자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다리면서 읽으려고 준비한 책을 꺼냈다. 40분의 놀이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보호자는 로비에서 기다려야 한다. 잠깐이지만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려는데, 바로 앞에 있는 상담실이 소란스러웠다. 다양한 아이가 오는 만큼, 귀 기울이지 않으려 했다. 다른 아이의 상담 과정에 무심하고 싶었다. 지금의 상황만으로 충분히 괴로워서, 다른 이의 고통까지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마음과 달리, 자꾸만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은 책에서 치료실로 향했다.
“시안아, 이거 뭐야? 밥 먹을 때 쓰는 거.”
“시안아, 이거 뭐야?”
“시안아, 여기 봐야지.”
아마도 언어 치료 중인 것 같았다. 언어 치료하는 아이를 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추측이 됐다. 상담사가 아이에게 단어 카드를 보여주고, 카드에 표현된 단어를 말해보게 하는 것 같았다. 상담사는 1분 간격으로 아이 이름을 부른 뒤, 단어 설명을 했다. 상담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 아빠로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시안아, 이거 뭐야. 시안아, 여기 봐야지. 질문은 계속됐다. 로비에 앉아서 그저 엿들을 뿐인 내가 피로해졌다. 방안의 아이는 얼마나 피로할까.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질문 폭격에 비해, 아이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가끔 “으어” “우이” 같은 옹알이 비슷한 외마디 외침이 들려올 뿐이었다.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시끄러워서만은 아니었다. 언어 치료실에서의 상황에 나까지 사로잡혀 있어서였다. 아이의 한마디 말을 끌어내기 위해, 상담사 옆에서 상담사가 이미 한 질문을 되뇌는 아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저 치료실 속 아빠의 마음이 내 것과 다르지 않아서. 낯설지 않은 아이와 아빠가 만드는 풍경이 우리 집 풍경 같아서였다.
시끌시끌하던 상담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4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장화를 신은 발로 첨벙첨벙 상담실 밖으로 뛰어나왔다. 뒤이어 아빠로 보이는 남성이 따라 나왔다. “빨리 화장실 다녀오자.” 아이와 아빠는 손을 잡고 센터 문을 나섰다. 잠시 후 화장실을 다녀온 아이는 왜인지 다시 상담실로 들어가기 싫어했다. 아빠는 부드럽게 아이의 팔을 잡아당겼고, 아이는 뒷걸음치며,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이는 소파를 가리키더니 “앉아.”라고 말했다. “여기 앉자고? 안 돼. 다시 들어가야지. 자 어서 들어가자.” 아빠는 순식간에 아이를 안고 치료실로 들어갔고, 남색 장화 한 짝이 치료실 앞 바닥에 떨어졌다. 주인 잃은 장화 한 짝은 정갈한 로비 풍경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장화를 바라보며, 치료실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이를 치료실로 데리고 가야 하는 아빠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들리는 소리만으로는 다소 혼란하고 약간은 폭력적으로도 느껴지는 언어 치료에 대해서 생각하고, 옆 방에서 놀이치료를 받고있는 내 딸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오늘은 우울하다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는 아이를 억지로 놀이치료실로 보낸 나에 대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지금 소아 상담센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오른편에 있는 진료실 문을 바라본다. 닫힌 문 중앙에 난 조그만 창문이 어두웠다. 진료실 불이 꺼진 듯했다. 비로소 데스크에 쓰인 “휴가로 인해 진료는 쉽니다.” 문구를 알아차렸다. 의사의 부재중에도 돌아가는 병원 내 상담센터에 대해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상담센터를 찾는 어린이들이 많아진 걸까. 놀이터에서 비워지는 공간들은 이곳에서 채워지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흐르고, 시곗바늘의 분침이 40분에 거의 가까워졌다. 내 옆에서 아이스 커피를 홀짝이며 40분간 조용히 앉아 있던 여자가 갑자기 일어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여자의 아들이 놀이치료가 끝난 모양이었다. 상담실을 나와 그녀에게 오는 아이를, 여자는 버선발로 마중 나가듯 맞이했다. 아이는 엄마와 나 사이에 자리를 잡고 풀썩이며 앉았다. 다리를 쭉 펴고 발을 흔들어 운동화를 벗어 던졌다. 아이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나까지 긴장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여자는 바스락거리며 핸드백 속을 뒤지더니, 새우깡을 꺼냈다.
“엄마가 간식으로 새우깡 가져왔어. 쉬는 동안 새우깡 먹자.”
“우와, 새우깡 좋아. 새우깡. 새우깡.”
아이는 장단에 맞춰 발을 까딱까딱 흔들며, 노래하듯 말했다. 쉬는 시간을 언급하는 걸 보면, 아이는 놀이치료를 연속으로 받아야 하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부산스러운 손놀림으로 새우깡 봉지를 뜯어 아이에게 주었고, 아이는 행복해했다. 새우깡만으로, 새우깡을 먹는 아이만으로, 어두웠던 로비가 불이 켜지는 느낌이었다. 신이 나서 새우깡을 먹던 아이는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했다. 기침과 함께 입에서 나온 새우깡 조각들이 아이와 내 사이의 공간에 흩어졌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갑자기 기침해서.”
여자는 사과하며, 급히 물티슈를 꺼내 소파를 닦았다. 여자가 너무 죄송해해서, 내가 더 미안했다. 괜찮다고 손사래하고는, 여자가 무안하지 않게 괜히 책을 보는 척했다.
“물 좀 줄까?”
“아니, 괜찮아. 새우깡 먹을래.”
아이만 바라보는 엄마의 물음과 아무렇지 않게 엄마의 마음을 받는 아이의 대답을 함께 듣는다. 엄마와 아이의 자연스러운 모습. 놀이터나 공원 벤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걸음 정도를 걸어가더니, 새우깡 먹는 아이의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신발도 벗어버린 채 새우깡 먹는 아이의 모습을, 상담센터 로비 의자에 앉아 대기하는 아이의 모습을. 그녀는 귀여워 어쩔 줄 모르며 사진 찍는 놀이터의, 공원의 여느 엄마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내게서 무언가가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녀와 그녀 아이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아름다웠다. 그들의 풍경은 무언가를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지금의 모습 자체로 자연스러웠다. 그들을 놀이터나 공원에서 마주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상담센터라는 특수한 상황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생경하게 느껴지게 했다. 모두가 긴장하고, 날을 세우고,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인 이곳에서 그들은 새우깡과 자식의 귀여움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이곳에서 이상했고, 그들에겐 자연스러웠다. 그녀라고 아이에 대한 걱정이 없을까. 그들은 내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잊고 있던 본질을 생각하게 했다. 시간이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을 지유의 아홉 살, 칠월의 날들에 대해. 비 오는 수요일 오후 아이와 함께 들었던 음악에 대해. 장화를 신고 웅덩이 속을 뛰어놀기 좋아하는 어린이의 마음에 대해.
등교 거부를 시작했던 사월 이후,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건 지유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두려움 속에 있었다. 지금은 학교에 가고 있지만, 언제 다시 가지 않겠다고 할지 모른다. 지금은 잦아든 강박행동이 다시 시작될까 두려웠다. 불안으로 인한 행동일까, 아이의 사소한 행동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민했다. 아이의 불안을 없애주기 위해 병원과 상담센터를 다니면서, 내 불안은 커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난 그녀와 달리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우리 아이와 내게 무엇이 더 소중한지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녀와 내가 다른 점은 상황을 직면하는 태도에서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일 것이다. 이곳에서의 치료를 하나의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여부다. 그녀는 받아들였고, 나는 여전히 거부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나는 지금 이곳의 상황을 어색하고 불편하게만 받아들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와야 하는 놀이치료를 이상한 것으로 치부하고, 그 치료를 받는 내 딸을 이상한 아이로 치부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때다. 용기를 내야 한다. 지유는 현재 불안이 높은 상태의 아이다. 그리고 여기, 이곳, 소아 신경정신과에서 상담을 기다리는 일은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이다. 항불안제 약을 복용하고, 놀이치료를 주기적으로 받는 것에 겁내지 말자. 중요한 것은 지유가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는 것. 아홉 살의 여름을 혼자 책에만 파묻혀 보내지 않는 것, 집안에만 틀어박히지 않는 것, 거부당할지라도 친구에게 말 걸어보는 것, 부끄러움을 누르고 발표 시간에 손 들어보는 것, 햇살이 가득한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뛰놀아 보는 것. 이런 작은 경험들이 하나씩 하나씩 지유의 아홉 살 시절에 수놓아진다면 되는 것 아닐까. 훗날 지유가 아홉 살을 되돌아봤을 때 기억할 만한 추억들이 가득하면 되는 것 아닐까.
상담센터 로비에서 지유를 기다리는 40분 동안, 책은 펼쳐진 채로 한 장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