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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재 Oct 10. 2024

터널을 나간다면

지유의 학교는 한 반당 한 명의 지적 장애 친구가 배정된다. 지적 장애 친구들은 2교시까지 일반 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듣고, 나머지 시간은 특수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다. 사실 지유는 장애우에 대한 호기심, 관심이 많아서 역할 놀이로 장애우 역할을 자주 하곤 했다. 정작 장애우를 본 경험은 없었는데, 초등학교에서 처음 지적 장애우를 보게 된 것이다. 아이가 어떻게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아 했다. 지유는 동생 같은 친구, 느린 친구라고 부르곤 했다. 장애우 친구와 짝꿍이 된 주에는 쉬는 시간에 자주 노는 것 같았다.     


“어? 지유야, 알림장 안 가져왔네?”

“아아, 그거 재희가 가져갔나 봐. 자꾸 내 꺼를 자기 꺼라고 장난치더니, 진짜 가져갔네. 아이.”

“그래? 내일 받으면 되지. 오늘 재희랑 같이 놀았어?”

“응. 재희랑 노는 거 은근히 재미있어. 그냥 뽀로로 캐릭터 이름 물어보면 돼. 그리고 웃긴 표정 지으면, 엄청 좋아해. 약간, 어린이집 동생 같애. 느리고 잘 모르니까 내가 도와주고 있지.”

“그렇구나. 도와주기도 하면서, 친하게 지내.”     


동생들과 놀기 좋아하는 지유에게 재희는 동생처럼 편안한 친구인 것 같았다. 지유처럼 불안이 높은 아이들은 자신 앞에 놓인 상황을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예측 불가능한 행동이나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아무래도 예측하기 쉽고, 자신이 놀이를 주도할 수 있으니, 안심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또래 친구는 부딪히는 일도,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로 흘러가 버리는 일도 많다. 요즘처럼 불안이 높은 시기에 지유는 차라리 혼자 있기를 택한다. 친하게 지내던 단짝도 외면한 지 수개월째다. 학교에서는 책이 친구다. 쉬는 시간마다 엄마에게 전화하는 일 외에는 책에만 파묻혀 사는 생활. 학교 밖에서는 4살 동생의 친구들과 함께 논다. 놀이터에서 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의 지유는 학교에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밝고 명랑하다. 동생들과 놀아주는 모습을 본 엄마들은 착하다, 씩씩하다, 사회성이 좋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고맙다는 말에 겉으론 웃으면서 듣지만, 속으로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순간이다. 지유에게 지금 재희와 노는 시간, 동생들과 노는 시간은 그들말고는 대안이 없어서다.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꼭 필요한 놀이시간이다. 


지유를 바라보며 새삼 옛일이 떠올랐다. 내게도 있었던 특별한 친구, 구연이.     


4학년이 되며 새로운 학교에 전학했다. 한동안은 친구 없이 혼자였다.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누군가는 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와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여자아이 무리의 대표 격인 아이가 나를 따돌리기로 주동하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야무지게 앙다문 입을 가진 아이였다. 속절없이 쉬는 시간은 홀로 보내야 했다. 그때 처음으로 절대 시간이 짧아도, 상대적으로 더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부하는 50분의 시간보다 10분의 쉬는 시간이 나를 괴롭게 했다. 견디기 힘들었던 쉬는 시간, 맨 앞자리에 앉았던 키 작은 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유난히 하얗고 둥근 얼굴에 키가 또래보다 몇십 센티미터는 작았다. 친구의 이름은 구연. 구연동화가 생각나는 예쁜 이름의 친구는 지적 장애우였다. 당시엔 지적 장애우를 잘 모르기도 했고, 지금의 지유처럼, 그저 유치원생 같은 친구라고만 생각했다.      


3월의 어느 날 구연이 집에 초대받았다. 당시엔 친한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냥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과 초대받아 가는 것의 차이는 아이 엄마의 초대가 있느냐의 여부였다. 나는 초대를 받은 것이었고, 약속된 일자와 시간에 집을 찾아갔다. 구연이 집은 연립 주택이 많은 우리 동네에서는 조금 떨어진, 단독주택 단지에 있었다. 작지만 분명한 정원이 있었고, 하얀색 목조로 지어진 예쁜 주택이었다. 초인종을 누르니, 화려하게 화장한 얼굴에 홈 원피스를 입은 구연 엄마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옆에는 집처럼 새하얀 아일렛 원피스를 차려입은 구연이가 곱슬곱슬 드라이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어머~ 네가 연재니? 어서 와~ 반갑다!”

구연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반겨주었다. 목청이 너무 커서 조금 놀랐고, 뒤로 주춤했다.     

그날 구연이 집에서 뭐하고 놀았는지 기억은 희미하다. 다만, 구연 엄마에 대한 인상은 강렬하게 남아있다. 특이한 점은 다른 집에서는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양의 간식이었다. 구연 엄마는 우리가 노는 것을 지켜보기라도 하는지, 놀다가 간식이 떨어질 만하면 바로 다른 먹거리를 가져다주었다. 간식을 가져다주면서 구연 엄마는 내게 부탁하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연재야, 구연이랑 놀아줘서 고마워. 계속 사이좋게 잘 놀아줘.”

구연 엄마의 부탁을 듣고 나니 왠지 친구랑 노는 것이 아닌, 동생을 돌봐주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친구와 놀려고 온 것이었는데, 어쩌다 언니가 된 것 같은 느낌. 가까이에서 본 구연이는 생각보다 키가 더 작았고, 말이 느렸다. 무딘 발음으로 나를 부를 때면, 네 살 아이 같았다.      


구연이는 헝겊으로 된 토끼 인형을 좋아했다. 오래된 구식 인형이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었는지 닳아있었다. 구연이는 인형 놀이를 하자며 다양한 동물 인형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서로 인형을 하나씩 돌아가며 가지고 놀았다. 헝겊 토끼 인형이 나뒹굴어 있기에 잠깐 가지고 역할을 했다.

“끼야야앗! 안됏!”

구연의 외마디 소리에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구연이는 날카로운 손동작으로 토끼 인형을 낚아채 갔다. 소리를 듣고 오셨는지, 어느 틈에 문 뒤에 희미한 미소의 구연 엄마가 서 있었다.

“연재야, 미안해.”

구연에게 받아야 할 사과를 구연 엄마에게 받으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집에 가고 싶어지려는 찰나, 구연 엄마는 김치전을 가져다주셨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김치전을 먹었다. 김치전은 조금 전의 소동을 잊을 만한 맛이었다. 바삭바삭 튀기듯 구워진 겉면에, 적당히 짭쪼름하면서도 새콤했던 김치전은 지금까지도 맛을 기억한다. 창문 너머로 해가 기우는 것을 보았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주택 단지는 가로등 빛이 옅어서, 해가 떨어지면 집에 가기 어려웠다. 조급했다. 구연이에게 집에 가겠다고 하자, 구연이보다 구연이 엄마가 더 아쉬워했다.

“연재야, 다음에 또 놀러 와~ 알았지?”

“네에. 안녕히 계세요.”

“앞으로도 학교에서 구연이 잘 부탁할게. 연재만 믿을게.”     


집으로 걸어오는 길, 구연 엄마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학교에서 구연이 잘 부탁한다. 연재만 믿을게. 믿을게. 부탁한다. 분명 친구와 즐겁고 놀고 오는 길이었지만,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음이 무거워진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땅만 보고 걸어갔다.     


5월이 되었고 내게도 친구들이 생겼다. 이제 쉬는 시간을 혼자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따돌림을 주동했던 까무잡잡한 아이가 나를 친구로 받아들여 주기로 한 것이다. 따돌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나를 따돌렸다는 괘씸함보다, 혼자 있게 될 불안이 더 두려웠다. 그저 혼자 있기 싫다는 이유로, 친구들 사이에 섞여 있고 싶다는 이유로, 나를 따돌렸던 아이들과 어울렸다. 구연이와는 그다지 친해지지 못했다. 집에 초대받기 전이나, 이후나 비슷했다. 구연 엄마의 부탁이 있기도 해서 구연이가 신경 쓰였지만, 구연이가 보통의 아이와 다르다는 점이 점차 크게 다가왔다. 친구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구연이는 잊혀갔다. 가끔 나를 바라보는 그 아이의 눈빛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때 내겐 친구들과 노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 친구들과는 2학기가 되면서 더욱 친해졌고. 5학년이 되어서도 계속 사이를 유지했다. 그리고 5학년이 끝나갈 때쯤, 또다시 이사하게 되면서 친구들과는 헤어졌다. 구연의 소식은 알지 못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4학년 때의 친구 중 누구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구연의 이름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하얀색 목조건물의 세련된 주택의 모습과 구연 엄마가 내게 주었던 환대와 친절을 잊지 못한다. 그때의 나역시 힘들고 아팠던 시절이었다. 전학한 학교에서 반 친구들은 누구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동네에 아는 아이 한 명도 없는 그곳에서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때 내게 구연이는, 지유에겐 재희 같은, 놀이터의 동생들 같은 친구였다. 유일하게 손 내밀어 준, 손 내밀 수 있는 친구.     


비극은 창문 너머 다른 집 이야기라고만 믿고 싶었던 그때, 내게 구연의 존재는 부담스러웠다. 책임을 맡기에는 구연의 상황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밝게 웃는 구연 엄마의 뒤에 있을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끌려가기 싫었다. 아이들의 따돌림 속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려웠던 나는 이미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었다. 친구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나오고 싶었다.     


구연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알지 못한다. 구연 엄마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구연 엄마가 구연이를 키우면서 숱하게 걱정했을 밤과 낮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또래 아이들을 볼 때마다 비교하듯 자식에 대한 걱정이 생겼을 것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친구들 사이로 들어가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혼자인 구연이가 안타까웠을 것이다. 집에 친구를 초대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기쁘면서도 조바심이 났겠지. 구연이 만한 아이를 키우게 된 지금에서야, 구연 엄마에게 공감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지유를 보며 눈물짓다, 그때의 구연 엄마를 생각한다. 그녀가 흘렸을 눈물을 짐작한다. 지유가 쉬는 시간에 친구와 놀았다고 했을 때, 느꼈던 안도가 구연 엄마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반 친구들 누구와도 말하지 않으며 장애우 친구와 노는 지유를 바라보며, 따돌림 속에서 간신히 장애우 친구와 놀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은 흐르고 흘러, 그때 그 시절 장애우 친구의 엄마를 떠올리고,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고 만다. 그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유도 마음이 괜찮아지면 다시 또래 친구들과 어울릴 것이다. 30년이 넘게 구연의 이름을 잊고 살았던 나처럼, 아픈 시절의 기억도, 그 시절 유일했던 장애우 친구의 이름도 잊고, 현재의 즐거움을 쫓게 될 것이다. 어쩌면, 엄마로서 지유에게 가장 원하고 바라는 상황이다.      


그런데 어쩐지, 이번에는 마음이 간단히 거둬지지 않을 것 같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구연 엄마의 미소 띤 얼굴을 외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친절한 얼굴 뒤에 숨겨졌던 애절한 그녀의 마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새끼만 잘 되면 돼, 나만 잘 살면 돼, 이런 마음이 더 이상 동하지 않는다. 나 역시 아픈 아이의 엄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유와 나는 불안의 터널 속을 지나고 있다. 마냥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조금씩 강해지고 단단해지고 있다. 지유는 30년전의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고통을 겪으며 조금 더 주변을 넓고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본다. 지금의 어려움과 고통을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터널 속에 있는 누군가를 지나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만약, 만약, 우리가 터널을 나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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