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 우는 아이, 우는 엄마
학교에 가기 무서워하기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난 날.
다시 찾아온 월요일. 월요일마다 아이도 나도 괴롭다. 학교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다. 아이는 등교 때마다 시장에 끌려가는 코뚜레 한 소처럼 교실에 들어간다. 1학년 때도 이런 적 없던 아이의 변화에 혼란스럽다. 도대체 이 아이는 왜 이럴까. 애한테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주변에서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의아함과 안타까움, 불안함, 괴로움 온갖 생각과 감정이 교차한다.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다. 주저앉아 울고 싶지만. 그렇지만. 우는 아이 옆에서 우는 엄마가 될 순 없으니, 이를 악물 수밖에.
D+14, 나 잘한 거야?
교실까지 데려다주는 등굣길, 2주째다.
교문을 통과할 때마다 난감하다. 지유의 학교는 등교 시간 동안 교장, 교감 선생님이 교문 앞에 나와 계신다. 정문과 후문에 번갈아서 계시는데, 아이들과 눈 맞추며 인사하신다. 아이들만 쏙쏙 들어가는 교문에서 교장 선생님은 유일한 어른이다. 교문을 통과하며, 나는 불쑥 나타난 또 다른 어른이 된다.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것 같은 난감함. 머쓱해서 선생님께 인사를 열심히 하게 된다. 인사성이 바르게 되어간다.
이번 주부터는 교실 앞이 아닌 3층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있다. 교실 앞에서 헤어질 때는 같은 반 아이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아이들에겐 충분히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아직 불안해하는 지유를 어르고 달래서 3층 계단참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교실에서는 떨어졌지만,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등교하는 길에 계단을 지나는 같은 학년 아이들이 우리를 힐끔거린다. 정작 지유 본인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헤어질 때는 뽀뽀를 꼭 다섯 번을 시킨다. 그것으로 모자라 뒤돌아서 가는 등에다 작별 인사를 가장한 확인 질문 세례를 퍼붓는다.
“엄마! 안녕! 이렇게 들어가면 나 잘한 거야? 나 잘한 거야?!”
“지유야, 잘 들어가. 응, 잘했어.”
“엄마! 나 잘한 거야?”
“응, 그래, 잘했어.”
“엄마, 엄마! 한번 웃어줘! 괜찮은 거지?”
“응, 그만. 이제 됐어. 빨리 들어가.”
엄마에게 확인 질문하는 습관. 불안 강박을 가진 아이들의 증상 중 하나다. 잘했다, 괜찮다는 말을 열 번을 해줘도, 불안한 마음이 쉬이 가셔지지 않는다. 지유는 자신이 같은 질문을 열 번을 묻고 있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지유의 그런 마음을 알기에, 일시적인 증상임을 알기에, 나는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뽀뽀하고 인사하고 싶다. 그러고 싶었다,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내 눈엔 지유 외에도 지유의 옆에 있는 2학년 아이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눈에 읽힌다.
‘쟤는 왜 엄마랑 여기까지 와서 헤어지는 거지?’
‘쟤는 아직도 아기 같네.’
‘아으, 유치하게 왜 저래?’
어쩌면 우리도 모르게, 교실에 소문이 퍼지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일을 계기로 따돌림을 당하게 되면 어떡하지? 당장은 아이의 불안이 심해 데려다주고 있지만, 이게 장기적으로 아이를 위하는 일이 맞는 걸까? 엄마로서 아이를 위한 최선이 무엇일까? 걱정은 소용돌이가 되어 머릿속을 휩쓴다.
지유를 데려다주고 집에 가는 길, 같은 반 친구의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그동안 궁금했던 걸 참으신 듯 물으셨다.
“아니, 근데 왜 지유는 학교 안에까지 데려다줘요?”
“아아, 학교 가기 무섭다고 해서요. 하하.”
다른 아이들도 지유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아이들의 엄마와 할머니도. 담임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도. 지유는 왜 그런 걸까 하고.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을 지유의 그림을 다시 그려주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확성기에다 대고 해명하고 싶다.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냥, 지금, 잠깐, 그런 거라고요.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저, 이 시기가 지나가길 기다린다.
D+21, 느린 아이
학교에 들어가기 힘들어 한지 3주째, 여전히 건물 3층까지 데려다주고 있다.
하교 후, 여느 날과 달리 지유가 소파에 앉아 조용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지유야, 오늘 학교 어땠어?”
“엄마, 왜 난 다른 애들보다 느린 걸까? 다른 애들보다 못하는 것도 많고.”
올 것이 왔구나. 걱정하던 지점이었다. 느리다니, 느리다는 말은 어디서 들은 걸까. 친구들과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걸까. 캐묻기보다는 해줄 수 있을 말을 골랐다.
“아니야. 느린 게 아니라, 천천히 크는 거야. 그건 괜찮아. 지유가 섬세해서 그래. 섬세하니까 다른 애들보다 많이 느끼고 깊이 생각하고. 그래서 시간이 더 걸리는 거야.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어. 남들이 못하는 생각을 해내고, 깊이 생각할 줄 알고, 창의적인 건 아무나 못 하는 좋은 점이지.”
학교 앞에서 울면서 헤어지진 않게 되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났다. 골치가 아프다.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각자의 속도대로 삶을 꾸려나가는 법을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나조차도 잘 모르겠는데.
D+28, 별것 아니었어
4주가 지났고, 학교 건물 2층까지 데려다주고 있다.
3층에서 2층으로 줄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한 층의 차이인데 아이에겐 크게 느껴지는 걸까. 다행히 2층에는 지유가 좋아하는 도서실이 있어서 줄일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3층에서 만난 2학년 친구들의 시선은 내게 잊히지 않는 눈빛으로 새겨졌다. 아이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우린 등교 시간을 10분 일찍 당겼다.
여전히 지유는 월요일만 되면 불안으로 떤다. 다행인 건, 두려움이 밀려오는 순간만 잘 버텨내면, 평온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아이는 여전히 버티고 있다. 아이를 바라보면 버틴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월요일 아침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해가 높아져 오후가 되면 말간 얼굴이 되어 교문을 나온다. 등교가 불온한 파도라면, 하교는 빛나는 윤슬이다.
오늘은 하교 시간에 조금 늦게 데리러 갔다. 멀리 지유가 혼자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곧 지유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뛰어왔다. 우린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만났다.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자마자 얼른 뛰어가서 안아주었다.
“지유야! 대단하다! 어떻게 여기까지 혼자 왔어? 엄마한테 전화도 안 하고. 대단한데~”
“엄마! 한 번 해봤는데, 해보니까 별것 아니었어! 아침에 울었던 건, 월요일이라서 그랬던 것 같아.”
우리는 만나자마자 신이 나서 떠들었다. 나를 보는 지유의 얼굴이 햇빛을 받아 찬란했다. 오후의 윤슬이 눈앞에 있었다.
D+42, 향나무의 의미
6주째, 건물 1층에서 헤어지고 있다.
교실 앞까지 데려다주던 등굣길은 3층에서 2층으로, 그리고 1층이 되었다. 느리지만 변화는 분명히 있다.
우리는 1층 현관문 앞의 향나무 곁에서 헤어진다. 향나무는 우리에게 약속의 나무로 불리웠다. 지유는 약속의 나무 앞에서라면, 약속된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듯했다. 헤어질 때는 내게 향나무 잎 하나를 떼어주고, 자신도 하나를 가지고 갔다. 지유에게 향나무는 하나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듯했다. 약속된 장소, 약속된 헤어짐, 헤어질 때 나눠 가지는 징표, 향나무의 이미지. 이런 것들이 지유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불안을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마치, 어린 시절 늘 갖고 다니던 애착 인형처럼.
소아신경정신과 진료날, 담당의와의 상담 중 향나무에서의 헤어짐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의사 선생님은 지유에게 약속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지유처럼 예민하고 불안의 감정이 높은 사람은 갑작스러운 상황을 마주할 때 당혹감을 크게 느끼기 쉽다. 어떤 일이 발생할 것에 대해 미리 알려주는 것이 좋은데, 약속을 해두면 마음에서 받아들이기가 좀 더 쉽다. 예민한 사람에게는 약속하는 것만으로, 내면에서 그것에 대해 여러차례 생각하게 되고, 시뮬레이션 해볼 수 있어 안전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담당의는 엄마와의 커플 아이템이나 작은 애착 물건을 학교에 갈 때 지니고 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권하기도 했다. 물건을 볼 때마다 엄마를 떠올리거나, 편안한 상황을 떠올리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쉬운 해결책이 있었다.
지유와 나는 바로 문방구에 갔고, 그곳에서 커플 아이템을 맞췄다. 눈알과 팔다리가 달린, 폼폼 키링이었다. 지유는 책가방에, 나는 매일 드는 핸드백에 달았다. 솜과 털만으로 만들어진 폼폼 키링은 가벼웠지만, 위력은 대단했다. 폼폼 키링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지유의 등굣길은 점차 가벼워져갔다. 헤어질 때 하는 인사 역시 가벼워졌다. 지유에겐 매일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엄마가 생긴 셈이었다. 마음 한구석 소용돌이가 일 때마다 키링을 바라보며 잠재우고 있을 터였다. 나 역시 키링을 바라보며, 지유를 생각한다. 오늘 하루도 감정에 휩싸이지 말자, 오늘 하루도 아이의 먼 미래를 위해 행동하자. 이렇게 보송보송 가벼운 해결책이라니.
D+52,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다
학교에 혼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지, 52일째.
오늘은 교장 선생님이 후문에 계신 날이다. 한껏 부푼 웨이브에 단정한 치마 정장을 입은 교장 선생님은 호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어머님! 이제 집에서부터 헤어져도 되지 않아요?”
“아, 네에.”
“이제 잘 들어가죠?”
“네네, 잘 들어가요.”
“그럼, 이제 집 앞에서 헤어지는 연습을 좀 해보시죠.”
“예에. 예, 알겠습니다. 하하.”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었다. 열흘 전부터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다. 엄마가 아이를 학교 안까지 데려다주는, 부자연스러운 일이 52일쯤 되면 이해하기 어렵다. 보통의, 자연스러운, 당연한 상식. 그러나 우리에겐 맞지 않았을 뿐이다. 어려운 말도 아니었다. 웃으며 흘려보낼 수 있다. 이제야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교장 선생님께 웃으며 인사하고 돌아왔다. 52일 전엔 알 수 없었던 것들, 52일이 되니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지유의 다름을, 속도를, 강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52일이 걸렸다.
하굣길, 지유에게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교장 선생님 핑계를 대며, 시도를 해볼까 싶었다.
“지유야, 오늘 엄마 교장 선생님께 혼이 났어.”
“왜?”
“응, 엄마가 학교 안까지 들어오면 원래 안 되는 건데, 데려다주느라 계속 들어갔잖아. 근데 이제는 안 된대.”
“그래?”
“응. 지유야, 한번 내일부터는 교문 앞에서 헤어져 보자!”
“음... 응!”
다른 아이들처럼, 다시 옛날처럼, 등굣길에 교문 앞에서 헤어지는 데 52일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