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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재 Oct 02. 2024

불안으로 잠식된 하루, 하루의 단면

소아신경정신과 병원을 다녀오고, 3일 후.      

이상한 하루였다. 평소엔 떨지 않는 너스레를 떨며, 웃기만 했던 하루. 월화수목금 5일 동안 웃지 않던 내가 토요일이 되어서야, 마치 그동안 웃음을 참기라도 한 듯이 웃어댔다. 이빨이 보일 만큼 웃고, 웃고, 웃었다. 쓸데없는 농담도 괜히 던졌다. 안 하던 짓이었다. 우울증 약을 3일 먹어서 였을까.      


시골 어머님댁에 왔다. 지유가 학교 가기를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하고 계셔서였다. 작은 걱정도 크게 하시곤 하는 어머님이었다. 이번엔 얼마나 상심하고 계실지 짐작이 갔다.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어머님 앞에서만은 괜찮은 척을 하고 싶었다.     


사실, 지유 진료를 받으면서 나도 함께 진료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엄마가 지금 마음이 많이 지친 상태라면서, 이대로는 아이를 돌보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한동안 우울증 약을 복용할 것을 권했다. 하루라도 울지 않고, 화내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별로 없던 한 달이었다. 우울증 약을 처방한다는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았다. 나는 볼일 해결하듯, 담담하게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서 약을 받아왔고, 자기 전에 한 알씩 먹었다. 그리고 3일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약을 먹는 걸 아는 건, 같이 병원을 갔던 친정엄마뿐이었다. 혹시라도 정신이 건강하지 않은 엄마가,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까 두려웠다. 나는 괜찮아야 했다. 아이는 아플지라도, 나는 아프지 않아야 했다. 난 지유를 돌봐야 하니까. 그렇게, 주말 내내 우리는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밝은 엄마와, 약 기운에 생기 없는 딸. 괴상한 모습을 하고 주말은 지나갔다. 그리고 월요일이 찾아왔다. 지옥의 월요일.     


또 시작이었다. 월요일 아침, 지유는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 교실 앞까지 데려다 달라고 떼를 쓰고, 교실 앞에 가서는 들어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 울음과 눈물과 고함소리, 설득과 협박과 간절한 달램. 교실 안 지유의 자리에는 주인 없는 가방만 덜렁 걸려있다. 다시 한번 울음과 눈물과 고함소리. 어거지로 실내화를 신긴 채, 가방과 마찬가지로 교실 안에 넣었다. 지유를, 가방처럼 교실 안에 넣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다 보고 있는 앞이었다. 이대로 이상한 아이라는 꼬리표는 확실하게 붙인 셈이었다. 가슴 속에 아이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소용돌이쳤다. 이런 방법밖에 없었을까. 시간을 보니, 1교시 끝나기 10분 전이었다. 지유의 등교 거부로 인해, 다른 친구들의 1교시 시간도 함께 소비되었다. 반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미안했다. 우리로 인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어야 하는 걸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지금 누구보다 괴로운 건, 지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음을 희생하고 있는 건 바로 나였다.     


지유는 교실에 들어갔지만, 불안함에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학교 도서실 앞에서 조금 기다렸다. 쉬는 시간 종이 울렸고, 지유가 도서실로 내려왔다. 엄마 얼굴을 확인하고 나니 안심하는 눈치였다.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우리 둘은 복도에 서 있었다. 이제 잘할 수 있지? 엄마 집에 가도 되지? 쉬는 시간되면 엄마한테 전화하면 돼. 이런 말들을 하면서. 다행히 2교시부터는 들어가 주었고, 집에 갈 수 있었다. 

진땀을 빼고 집에 돌아오니, 온몸의 긴장이 풀려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로 11시가 가까워왔다.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게 사치로 여겨졌다. 소파에 누웠고,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님이었다.     


“지유 학교 잘 들어갔니?”

“네. 교실 앞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서, 교실 앞에서 헤어졌지만요.”

“거 좀, 해줘라, 해줘. 교실 앞까지 데려다줘. 애가 해달라는 대로 좀 해줘!”     


나무라듯 말씀하시는 어머님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안 그러던 분이 그러셨기에 더 놀랐다. 걱정되는 마음에 목소리가 격양되신 듯했다. 주말에 너스레를 떨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을.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지만, 식구들의 걱정어린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웃었지만.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은, 아무도 모르게 숨기고 싶었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내 속을 내보이면,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 같아 무서웠다. 근심과 시름으로 가득 찬 우리집에서 벗어나, 시골집으로 도망가고 싶기도 했다. 지유 곁에서 매일 아침, 걱정들은 새롭게 태어나고, 몸집을 불리고, 영악해졌다. 오늘은 학교를 잘 들어갈까. 오늘 지유가 우는 모습을 본 아이들은 없을까. 학교 적응 못하는 아이로 선생님께 찍히는 건 아닐까. 언제까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할까. 이대로 공교육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혹시 지유는 평범한 아이가 되지 못하는 걸까.      


주변에서 알아주길 바랐나보다. 지유가 아픈 만큼, 나도 힘들고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지금 겪고 있는 일이 나중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까지 생각 못할 지유보다, 앞 일을 훤하게 보고 있는 나는 다른 의미로 아프다. 지유의 오늘은 나중에 어떤 장면으로 남게 될까. 지나간 옛일의 한 페이지로 보게 될까. 이 일이 시초가 되어, 불안장애 환자가 되는 걸까. 커서도 계속 항불안제를 복용해야 하는 어른이 되면 어쩌지. 사회 부적응자가 되면 어쩌지. 하루, 하루의 단면은 내게서 확대 해석된다. 확대된 단면은 걱정으로 뿌리 내리고, 걱정은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그리고 불안으로, 우울으로 돌아온다.     


티를 낼 걸 그랬다. 아프다고 티를 낼 걸 그랬다.

아이 못지않게 엄마도 아프다고. 엄마는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괜찮은 사람만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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