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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재 Sep 30. 2024

부끄러움의 규모

2월, 봄이 가까운 가운데 시샘이라도 하듯 폭설이 내렸다. 다음날 창문을 통해 본 세상은 온통 하얀색의 겨울왕국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풍경,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밖에 나가고 싶었다.          

“지유야, 우리 책 빌리러 나갔다 오자.”     

“오! 진짜? 그래그래!!”          

평소 같으면 춥거나 시간 없다는 핑계로 대여점에 가지 않던 엄마가 먼저 가자니, 마다할 지유가 아니었다. 신이 나서 금세 옷을 채비하고 현관문 앞에 섰다.                    


얼어붙은 듯 새하얀 풍경과 다르게 날은 따뜻했다. 한 번씩 바람이 불긴 했지만, 햇빛은 봄이었다. 역시 봄이 오는 건 막을 수 없겠지. 마지막일지도 모를 설경을 즐기기 위해 대여점까지 걷기로 했다. 가로수의 가지마다 눈이 쌓여 하얀 조각상이 줄지어 늘어선 듯했다. 소공원의 광장과 산책로도 하얀색, 놀이터의 모래사장도 하얀색, 차도 위의 자동차도 하얀색, 눈길 닿는 모든 곳이 하얀색이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하얀 오브제를 툭 툭 올려놓으면 이런 모습일까. 순백의 세상에 눈이 부셨다.          


휘잉. 바람 한 점에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눈이 날아와 머리 위로 쏟아졌다. 눈을 찌푸리며 아이 잠바에 붙어있는 모자를 씌웠다.     

“지유야, 눈 날리니까 모자 쓰자.”     

“아니야. 난 안 쓰는 게 더 좋아. 눈 오면 머리로 맞아야지. 이것도 자연현상이잖아. 자연스러운 게 좋아.”     

눈이 오면 그냥 맞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니. 눈이 내리는 자연현상에 빗대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수긍하고 말았다. 뜬금없는 대답을 하는 아이에게 나 역시 뜬금없는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지유야, 넌 소원이 뭐야?”     

“소원? 음… 내 소원은 지구에 쓰레기가 없어지는 거! 전 세계에 쓰레기가 없어지면 좋겠어. 지금 지구에 쓰레기가 너무 많다고! 으아악.”     

“진짜? 그게 소원이라고? 만약에 생일이라면. 생일 케이크에 촛불 끌 때 소원 빈다면, 뭐 빌 건데?”     

“첫 번째 소원으로는 쓰레기가 없어져서 남극과 북극에 얼음이 녹지 않게 해달라고.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가을이 길어지잖아.”     

“정말이야? 지구를 위해 소원을 써도 되겠어? 너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음… 이 소원은 두 번째 소원이야. 첫 번째 소원은 서준이랑 결혼하는 거! 서준이랑 결혼하게 해달라고 빌 거야.”                    


자연현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어서일까, 눈앞의 새하얀 설국의 풍경 덕분일까. 소원이 쓰레기가 사라지는 거라는 대답에 내심 놀랐다. 현실적으로 집요하게 파고든 엄마의 질문에 결혼으로 혼탁하게 마무리되긴 했지만. 어쨌든 아이의 첫 소망은 지구에 쏠려있었다. 사실, 지유는 평소 환경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른 아이다. 많고 많은 지유의 잔소리 중 80%는 “물을 안 쓸 때는 꺼야지”다. 화장실에서 세수하는 중에도,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중에도, 요리 중 채소를 다듬고 있을 때도 여지없이 잔소리가 날아든다. 물을 틀어놓은 채로 얼굴에 물을 묻히고, 비누를 문지르고, 다시 물로 헹구는 사이사이, 가차 없이 물을 잠가버린다. 비누 거품에 눈도 뜨지 못한 채, 다시 수전 손잡이를 올리는 일은 귀찮기만 했다. 나는 그만 짜증을 내고 만다.     

“지유야, 지금은 물 계속 쓰는 중이잖아. 물 좀 그만 꺼.”     

“그럼 빨리 씻고 물 잠가. 엄마처럼 물 낭비 하면, 지구가 아프다고!”     


짜증 낸 사람이 무색하게 선비 같은 말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반복된다. 웬만한 짜증으론 그녀를 막을 수 없다.          

물 아껴 쓰기뿐일까. 돌아다니며 안 쓰는 방의 불 끄고 다니기, 음식 남기지 않고 다 먹기, 빨대 안 쓰기, 물병 사용하기, 화장실 휴지 한 칸만 쓰기, 이면지 활용하기, 재활용품을 주워 와서 다시 재활용하기. 간혹 업사이클링 제품을 발견하면, 흥분으로 얼굴을 붉힌 채 큰 소리로 칭찬하고 손뼉도 쳐준다. 누가 보면 환경운동가의 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빌린 후 돌아오는데, 상가 길에 누군가 버린 젤리 봉지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젤리 봉지를 본 지유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주우려 했다. 왜 그런지 나는 그런 아이를 말렸다.      

“지유야~ 줍지 마! 근처에 쓰레기통도 없는데, 그거 주워서 어디에 버리려고.”     

“응? 집에 가지고 가서 버리려고 했는데? 집에 쓰레기통 있잖아.”     

“아니야, 아니야. 더러운 거 맨손으로 잡지 마.”     

“그럼, 이 쓰레기는 어떡해?”     

“환경미화원이 길에 있는 쓰레기 청소해 주실 거야…”          


학교에서 동네 쓰레기 줍는 봉사활동을 하고 난 후, 지유는 종종 쓰레기를 줍고 싶다고 하곤 했다. 그때마다 날씨 핑계, 시간 핑계, 학원 핑계, 온갖 핑계를 끌어와 지금은 안 된다고 답했다. 그러나 올 것은 오고야 마는 건가. 길가의 쓰레기를 주우려는 아이를, 쓰레기를 집까지 가져가서 버리겠다는 아이를, 극구 말리는 지금의 난 더 이상 핑계 뒤에 숨을 수 없다. 그저 더러운 쓰레기를 내 손으로, 내 아이 손으로 잡는 것이 싫을 뿐이다. 아이에게 속내를 들킨 듯, 지유의 팔을 잡은 손이 부끄러웠다.                    


“엄마. 하긴, 어차피 나 한 명이 쓰레기 줄인다고 지구 전체의 쓰레기가 줄어들 리가 없잖아. 지구가 얼마나 넓은데, 사람도 엄청 많이 살잖아. 쓰레기도 많이 나오고.”     


지유는, 조금 더 생각한 듯 말을 이었고,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쓰레기를 없애고 싶다는 지유의 첫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감수성따위 없는 이기적인 엄마로 인해, 지유의 마음이 무참히 짓밟혀져 버린건 아닐까. 지유의 환경을 걱정하는 섬세함, 예민한 감성은 어린시절의 내 모습을 일깨웠다.                


내가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은 쓰레기 산이 있던 동네에 있었다. 서울 최대의 쓰레기 매립지, 난지도가 있는 동네다. 지금은 하늘공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청량하게 다시 태어났지만, 사실 쓰레기가 하늘까지 닿을 만큼 쌓여서 마침내 산이 되어버린 곳이다. 당시만 해도 난지도 근처에 오면 악취가 난다는 소문이 있었다. 1999년 냄새날 것 같은 동네인 이곳으로 우리집은 이사왔다. 2002년에 월드컵 경기장이 건설되면서, 일대의 동네가 함께 좋아질 것으로 예상한 부모님 덕분이다. 참을성 있게 기다린 결과, 월드컵 경기장 건설과 함께 난지도의 쓰레기 산은 억새가 가득한 하늘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인근 상암동은 DMC 지구로 지정되면서 재건축이 활발히 진행됐고, 덩달아 우리집도 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부모님 인생 최초의 재테크 성공이었다. 쓰레기를 버리던 동네가 친자연적인 동네로 바뀌는 것은 자본이 들어가니 순식간이었다.        


쓰레기 산이 공원이 되는 기적은 집값을 올리는 데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쓰레기 산의 변화는 미래에의 희망을 떠올리게 했다. 환경을 살리고, 동네를 살리고, 사람들의 생활을 바꿔놓는 일, 조경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게 됐다. 한 사람의 인생 항로를 잡게 만든 변화였다. 십 대 소녀에게 미친 영향력이 이 정도니, 하늘공원이 가진 파급 효과는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크지 않았을까. 사실 2000년대에는 매립지 외에도 폐정수장, 폐공장 부지, 미개발지를 공원으로 재활용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동네에 새로 생긴 작은 산을 종종 들락거렸다. 계단으로 걸어 오르면 제법 숨이 찰 정도의 높이였다. 가을이면 드넓은 평원 가득 하얀 억새가 펼쳐졌다. 충청도나 전라도에 가야만 볼 수 있을 환영처럼 보였다. 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지는 하늘의 공활함은 가슴이 탁 트이게 했다. 어디에도 과거 쓰레기장의 모습은 없었다. 공원을 오르지 않는 날에는 주변을 산책했다. 옆에서 바라보는 하늘공원은 거대하게 느껴졌다. 산의 높이와 너비에서 오는 규모가 너무 웅장해서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산속에 묻혀있을 쓰레기, 쓰레기 더미의 웅장함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어느 날은 하늘공원을 보면서 잉카제국의 유산, 마추픽추를 떠올리기도 했다. 내게 하늘공원은 21세기 현대 문명이 남겨놓은 쓰레기 유적이었다.          

          

불가능하리라 믿었던 변화를 목도하며 가졌던 꿈과 희망, 이상을 꿈꾸던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예전에 쓰레기 산의 변화를 바라보며 느꼈던 숭고함이, 소중한 무언가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내게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는 소망이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인간은 아는 게 많아질수록 이기적이고 보수적으로 되어가는 걸까? 그런 내가 지유에게서 꿈꿀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야, 지유야. 한 명이 노력해서 바뀐 일도 있어. 스웨덴에 그레타 툰베리라는 언니는 15살 때 지구온난화를 막으려고 시위했어. 그것도 혼자서.”     

“진짜? 대단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른도 아니고 소녀가 시위를, 그것도 혼자 하니까 사람들이 대단하게 생각했고, 점점 유명해졌지. 그러다가 실제로 어떤 나라들에서는 지구온난화를 늦추기 위한 법을 만들게도 됐고.”                    


거창하게 그레타 툰베리를 논하려니 누가 듣기라도 할까, 수줍어 속삭이듯 말했다. 입으로는 그레타 툰베리를 말하면서, 마음속은 집에 쌓여있는 쓰레기를 떠올렸다. 다용도실에 산처럼 쌓여있는 재활용 쓰레기. 휴지통 안에 산처럼 담겨있는 휴지와 물티슈 더미. 육아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무신경하게 쓰고 버리게 된 일회용품으로 인한 쓰레기다. 산이 되어가도록 방치해 버린 일상의 무심함이 부끄러웠다. 아이의 냉소는 길가의 쓰레기보다 집안의 쓰레기에서 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늘공원은 해마다 10월이면 억새 축제를 열고 있다. 매년 많은 사람이 쓰레기 산을 오르지만, 그들에게 난지도는 잊힌 듯하다. 쓰레기 산을 공원으로 만들었으니 다 된 걸까? 어쩐지 초록 장막으로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덮어버린 느낌이다. 여전히 본가가 하늘공원 옆이라, 종종 하늘공원의 쓰레기 산더미를 찾아간다. 산을 올라도 보고, 옆으로 걸어도 본다. 인간이 15년간 버린 쓰레기가 어느 정도인지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곳. 2002년에 쓰레기 산이 공원으로 바뀌는 기적을, 처리해야 했던 부끄러움의 규모를 마주했지만, 쓰레기는 계속 생산되고 있다. 모두가 소원으로 빈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쓰레기양이다.     

     

하늘공원을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어야, 최소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지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예민한 환경 감수성을 가르쳐 준 이는 다름아닌, 아홉살 지유였다. 오늘도 어린이에게 한수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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