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재 Sep 19. 2024

그녀의 포스트잇

           

아침, 모두가 나가고 난 집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주인 없는 책상을 정리하는 일이다. 지유의 책상은 언제나 잔뜩 어질러져 있다. 책상에 앉아 숙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만들기도 하는 아이를 보면, 책상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이리저리 놓인 연필과 색연필을 연필꽂이에 가지런히 꽂고, 지우개는 선반에, 그림이 잔뜩 그려진 색색의 종이들은 종이 보관함에, 동화책과 학습지, 공책들은 종류별로 분류해 책상 한쪽에 놓아둔다. 아이가 만든 클레이 모형, 그림, 말린 꽃, 돌멩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다양한 것들은 버리지 않고 책상 위 구석에 모아둔다. 잡동사니가 많은 지유의 책상은 어지른 날이나 치운 날이나 비슷한 정도의 지저분을 유지한다. 아이 못지않게 나 역시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나 보다. 아이의 물건 하나하나마다 깃들어 있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버릴 수가 없다. 이야기 속 화자(지유)의 상황에 공감하고 나면, 내게도 소중한 물건이 되어버린다.     


책상 앞에는 보드가 있다. 보드에도 역시 다양한 것들이 붙어있다. 학교 공지 사항이 실린 종이, 2학년 받아쓰기 예상 문제, 할머니 할아버지와 찍은 단 한 장의 인생네컷, 1년에 한 번 만나는 친한 동생과 찍은 사진, 좋아하는 남자 친구에게 받은 첫 번째 손 편지, 초등학교 입학하고 일주일 후에 썼던 소감문, 방과 후 수업 시간에 4학년 언니에게서 받은 쪽지. 그리고 중앙에는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노란색 정사각의 포스트잇에는 단 3줄이 또박또박 네모난 글씨로 진하게 쓰여있다.     


혼자 학교 잘 가기

혼자 학원 잘 가기

안 간다고 떼쓰지 않기     


포스트잇에 적힌 3문장은 마치 결심을 적어놓듯, 결연함이 담긴 정자체의 꾹꾹 눌러쓴 필체다. 아마도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적었을 것이다. 포스트잇에 적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붙여놓은 걸 보면. 포스트잇을 적은 건, 한 달쯤 전의 일이다. 지금은 꿈꾸지도 못하는 상황을 바랄 때다. 무엇이든 혼자서 하기를 바라고 있을 때였다.      


아이들은 아이마다 기질과 발달 속도가 달라, 아이를 키우면서는 비교하면 안 된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알면서도 어리석은 어미는 매일 같이 누군가와 비교했다. 1학년인데도 한 달밖에 안 되어 혼자 등교하는 아이와. 학교가 끝나면 홀로 학원에 가는 같은 반 아이와. 횡단보도를 손을 번쩍 들고 혼자 건너는 아이와. 하교할 때 엄마가 있는지 둘러보지도 않은 채 홀연히 집으로 걸어가는 아이와. 겁이 많고 예민한 지유는 여기엔 해당되지 않는 아이였다. 2학년이 되었고, 지유는 여전히 학교에 혼자 가기 싫어했다. 다른 아이들도 엄마와 함께 등하교하는 아이들이 몇몇 있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끔 독립적인 아이를 만나면, 부러움이 담긴 시선으로 쫓긴 했지만.     


계속 엄마와 다녀도 괜찮은 걸까? 보호만 할 것이 아니라, 혼자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 아닌가? 점차 아이의 현재 모습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일단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자, 등하교할 때마다 피로가 몰려왔다. 주변의 아이들이 그냥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조금씩 요구하기 시작했다. 30여 년을 살며 갖춰진 논리로 힘을 실었다.     


“지유야, 혼자 학교 가는 거 연습해야 해.”

“지유야, 이제는 학원도 혼자 갈 수 있어야 해.”     


엄마와 자녀의 관계를,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로 생각하고 아이를 대하려고 애썼다. 아이를 한 명의 존재로서 존중해 주고 싶었다. 엄마라도 잘못한 게 있을 때는 사과했다. 힘든 점, 어려운 점이 있을 때는 아이에게 솔직히 이야기하기도 했다. 엄마지만, 엄마로서 당연히 치러야 하는 희생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도 한 명의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속이지 않았다. 지유 역시, 한 사람으로서의 역할과 권리를 올바르게 배울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서였다. 숨기지 않은 생각과 감정을 서로 교류하며, 아이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어쩌면, 준비되지 않은 아이에게 갑작스런 통보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2학년이 된 것만으로, 겁이 많던 아이가 다른 아이가 될 수는 없다. 2월의 아이와 3월의 아이는 별 차이가 없었을 텐데, 허망한 기대를 하고 말았다.     


이제 교문을 혼자 들어가지 못할 만큼, 두려움이 커져버린 지유에게 사과하고 싶다. 한 달전,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은 후 홀로 포스트잇을 적고 있던 지유에게 사과하고 싶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