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섬세함을 좋아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뭇잎을 말려오는 숙제가 있었다. 나뭇잎 한 장을 바싹 말려 건조된 잎사귀의 살들은 털어내고, 잎맥만을 남겨서 코팅을 해가는 것이었다. 뼈대만 남은 나뭇잎은 세밀하여 아름다웠다. 세밀하고 고르게 정돈된 잎맥의 섬세함이 주는 아름다움이었다. 초봄은 나뭇잎의 잎맥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계절이다. 봄이 되면, 산은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연둣빛의 나무들 사이로, 뼈대만 앙상한 나무들이 섬세하게 펼쳐진다. 겨울의 건조함을 지나, 봄만의 파스텔 빛 가지들이 눈에 들어오면, 마음도 조금 섬세해지는 듯하다. 작고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싶은 마음. 주목받지 못하는 구석까지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된다.
봄은 날씨도 제법 섬세함을 불러온다. 봄비는 시원한 여름비와 싸늘한 가을비, 으스스한 겨울비와도 다른 느낌이다. 촉촉한 봄비는 내리고 난 후에도 따스함이 도는 온기를 준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은 어떤가. 휭휭이나 씽씽이 아닌, 살랑살랑의 느낌이다. 게다가 봄바람에는 어딘가에 있을, 라일락이나 아카시아의 향이 스며있기도 한다.
섬세한 계절에 나는 주로 예민한 마음이 되어 살아갔던 것 같다. 3월, 무언가가 시작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학년,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계절이 바로 3월이기 때문이다. 시작하는 마음에는 잘 하고 싶은 마음과 그렇기에 불안한 마음이 함께한다. 더욱이 초등학교 4곳을 다닌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3월은 내게 자기소개를 준비하는 달이기도 했다. 자기소개를 사람들이 어떻게 들을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새로운 친구를 어떻게 사귈까? 늘 불안과 걱정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봄이 싫었다. 시작하는 일이 지긋지긋했다.
봄을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 건, 아무것도 시작할 일이 없게 되어서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를 퇴사하니, 매일이 똑같은 일상을 살아내는 것 뿐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비슷한 일상에서, 3월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제야 풍년화가 피고, 진달래가 피고, 개나리가 핀 후에 벚꽃이 피는 일을 즐겁게 바라볼 수 있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나는 적응력 만렙인 사람인 것처럼 아이에게 요구했다. 괜찮다고, 노력하면 다 할 수 있다고. 1학년 때는 2학기만 되면, 혼자 학교에 가게끔 만들려고 했다.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2학년이 되어서는 이제부터는 학교도 혼자 가고, 학원도 혼자 가도록 하려고 했다. 여전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괴로웠다. 왜 안 되는 것일까. 혼자 잘하는 다른 아이들을 보며, 비교하고 자책했다. 아이를 마음대로 하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어느 주말, 미술을 좋아하는 지유를 위해, 함께 미술관을 찾았다.
그곳에선 동화책 작가들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책과 그림을 좋아하는 지유에게 제격이었다. 지유는 동화책 속 그림의 원화를 감상하고, 한켠에 놓인 동화책을 읽으며 즐거워 했다. 전시장에는 체험 활동도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곳이 있었다. 지유는 편지지 위에 우편 모양의 스탬프 도장을 찍고, 마스킹 테이프로 주변을 둘러 꾸미는 데 열중했다. 편지 내용을 뭐라고 쓸지 궁금했지만, 아이가 싫어할까 모르는 체 했다. 아이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듯 편지지를 활짝 편 채로 글을 써 내려갔다.
미래의 지유에게.
안녕. 나 지유야. 난 12월의 지유야.
넌 학교도 잘 다니고, 학원도 잘 다니고 있어. 걱정하지 마.
지유가.
이미 봐버렸지만, 못 본 척하며 자리를 떴다. 차오른 눈물을 보여주기 싫기도 했다. 미래의 자신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가, 꿈 많은 어린이가 바라는 소망이, 학교 잘 가고, 학원 잘 가는 일상이라니. 그저 평범한 일상을 바라는 거라니. 다 알고 있었구나. 지유는 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학교를 잘 다녀야 한다는 것도, 학원을 잘 다녀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인정하고 있었다. 노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학교가기 싫다고, 학원가기 싫다고 악을 쓰며 울고 떼를 쓸 때는 마냥 어린아이 같았는데, 그 모든 것을 알고 노력하는 중이었다니. 알아주지 못해 미안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봄을 싫어했으면서. 그걸 잊고 있었을까. 3월을 끔찍이도 두려워했던 모습은 잊고, 완성된 12월의 자신만을 기억했을까. 학기 말에 친구들과 헤어지기 아쉬워했던, 즐거운 기억만으로 학교생활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학을 아무리 다녀도, 적응 잘하는 무던한 아이였던 듯 자신을 꾸며내고 있었다. 지유의 두려움과 불안을 겪었던 아이의 모습이 내 안에 있었는데도.
어른스러운 지유에 비해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누구보다 괴로운 건 지유였을 텐데, 그동안 아이만 탓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했다. 아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가고, 도와줘야 할 엄마이지만, 동시에 나아가지 못하는 아이의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공감해 줘야 할 엄마이기도 하다. 예민하여 처음 시작하는 것들을 잘 해내지 못하는 것도 지유이고, 섬세하게 자신의 마음과 상황을 글로 잘 표현해내는 것도 지유이다. 아이의 예민함을 탓하지 않으면서, 아이만의 섬세함을 알아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 역시 섬세한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옛날, 학교 숙제를 하면서 나뭇잎 잎맥이 주는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