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신경정신과의 첫 진료를 앞두고 부모 상담 기록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아동의 성장과정 중에서 큰 환경변화가 있었다면 구체적으로 적어주십시오. 라는 질문이 있었다. 옆에는 예시로 가족 구성원의 변화, 이사, 죽음, 투병 등이 적혀 있었다. 나는 즉시 답을 적어 내려갔다.
만 5세, 동생이 태어남
만 7세, 이사
쓰고 나니 깨달았다. 지유의 불안을 촉발시킨 배경은 이사였다는 걸. 우리는 이사한 지 1년이 되지 않았고, 지유에겐 큰 변화라는 걸.
지유의 유치원 시절을 함께했던 동네 미술학원을 그만두던 날. 아쉬움에 인사가 길어졌고, 이사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 이사하게 되어서요.”
“아, 정말요? 어디로요?”
“OO동으로요.”
“학군지로 가시는 거예요? 힘드실 텐데요.”
이사 갈 동네를 알아보러 갔던 날은 단풍이 아름답게 든 10월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지유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이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였다. 우리에겐 아이들이 걸어서 학교에 안전하게 통학할 수 있는 동네가 필요했다. 지금의 동네에서 배정된 학교는 6차선 도로가 인접하고 있어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같은 지역구 내에서 학군지로 불리는 동네였다. 이 동네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중학교까지는 문제없이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 터였다. 초등학교를 먼저 찾았다. 이곳의 초등학교는 우리 동네와 달리, 일방통행 1차선 도로에 둘러싸여 있었다. 학교 정문 앞에는 문방구가 있었고, 후문에서 걸어가면 분식점과 놀이터, 소공원이 가까웠다.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잠시 차를 세우고, 아이들과 학교 주위를 걸어보았다.
“엄마, 저기 문방구에서 뽑기하면 안돼?”
뽑기 통을 보고 신이 난 아이들은 벌써 문구점으로 뛰어갔다. 차를 타고 다른 아파트 단지로 가야만 찾을 수 있던 뽑기 통이 눈앞에 있다니, 나부터 반가웠다. 아이들이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이곳에서의 모습들이 그려졌다. 학교가 끝나면 문구점에 들러 뽑기하는 모습, 친구들과 놀이터로 뛰어가는 모습, 아이의 손을 잡고 산책로를 걷는 내 모습. 모두 자연스러웠다. 이곳이라면 안심하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하고 첫 집에서는 8년을 살았다. 앞으로 결혼하게 될 남자와 살 집을 알아보러 다니던 겨울날의 아침. 12월, 겨울의 한복판이었지만 설렘과 희망으로 추운 줄도 몰랐다. 그 집에서는 저녁마다 자주 와인 잔을 부딪쳤다. 2년 후 태어난 아이가 걸음마를 뗐다. 곧 아이는 두 명이 되어 소꿉놀이와 숨바꼭질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8년 전과는 달랐다. 백지처럼 청순했던 과거와 달리, 머릿속은 이미 많은 장면이 들어와 있었다. 장면마다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였다. 소중한 것이 많아진 만큼 따지는 것도 많아졌다. 어느 것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주변 환경이 안전한지, 공원이나 놀이터가 가까이에 있는지, 학원가와 가까운지, 상가와 가까운지, 주변 학교가 공부를 잘하는지, 무엇보다 부동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는지까지. 그리고 학군지인 이곳은 가격 빼고 모든 면에서 흡족스러웠다.
이사할 집을 알아보는 우리에게서 과거 엄마 아빠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우리집은 이사를 많이 다녔다. 어느날은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 이사할 집을 보러 가기도 했다. 모르는 동네, 새로운 학교, 낯섦이 불러오는 불안하고 설레던 공기. 그때 느낀 공기가 이곳에도 흐르는 듯했다. 집을 알아보러 다니던 엄마의 얼굴은 어땠었나. 기대감으로 상기되어 있었는지, 불안으로 어두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어린 내게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니는 일은 그저 신기했다.
그저 신났던 어린 시절의 나처럼, 지유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도의 위협없이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안전한 학교, 뽑기 통이 있는 문방구가 가까운 동네, 소공원과 놀이터가 가까운 동네라면 지유도 금세 적응하고 좋아할 거라고.
이듬해 2월에 우리는 이사했다. 이사 이후, 남편은 무리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를 탄 것 같은 남편의 모습은 괜찮은 건지 걱정스럽다. 우리는 잘하고 있는 걸까. 이것이 최선일까. 번뇌는 가득하고, 욕심은 내려놓지 못한다. 지유는 유치원 시절의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많이 힘들어했다. 이전 집에 대한 애정으로, 자주 그 집을 보러 가고 싶어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이제는 이곳에 적응하라고, 이 동네를 좋아해 보라고 했다. 생각보다 지유에게 이사는 받아들이기 힘든 변화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땐 지유에 대해서도, 불안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변화는 불안을 촉발시키기에 아주 좋은 매개가 된다는 것을.
이사뿐만이 아니다. 지유는 동생이 태어났던 해에도 홀로 가슴앓이를 했다. 동생이 태어나고 3개월쯤 되었을 때, 눈을 깜빡이는 틱 증세가 나타났다. 그때 당시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육아종합지원센터에서 무료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상담사는 지유의 증세를 보고 놀이치료를 권했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우리는 비용이 부담스러워 치료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지유의 증상이 나아지기만을, 눈 깜빡임을 멈추기만을 바라며 지켜보기만 했다. 생각해보면, 지유는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내왔다. 아이 나름의 힘든 상황을 알려왔을 때, 왜 우리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을까.
아동의 어려움으로 검사 및 상담 경험이 있으시면 적어주십시오.
지유의 예전 상담 내용들을 작성하며, 지난 일 년을 돌아본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날들이다. 지유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튀는 아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도 짜증을 잘 내는 아이였지만, 엄마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거칠게 대했고, 마음을 열지 않았다. 고민 끝에 뇌과학 전문상담사 유 선생님을 만났다.
유 선생님과의 첫 상담 날, 뇌과학을 전문으로 하는 상담이어서인지 뇌파 검사를 진행했다. 지유는 상담 센터에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다. 처음 하는 것에 유독 긴장하는 탓에, 지유는 바짝 얼어붙은 몸으로 센터에 들어갔다. 유 선생님이 상냥한 말투로 인형을 보여주며 완화하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얼어붙은 상태로 상담이 진행됐고, 잠시 대화를 나누던 선생님은 뇌파 검사를 해보자고 권유했다.
지유가 해야 할 일은 동그란 모양의 전극이 붙은 검은색 머리띠를 이마에 붙인 채 의자에 앉아 5분간 노트북 모니터를 보는 것이었다. 5분 동안 모니터에 나오는 영상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지유에겐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다. 일단 전극이 붙은 머리띠를 이마에 착용하는 것부터 심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엄마와 떨어져 혼자 검사실 안에 있는 상황도 몹시 불안해했다. 아이의 완강한 거부에 검사를 진행하기 어려웠다. 유 선생님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난감해했다. 검사하는 동안 다른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전극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정확한 결과를 얻어내기 어려웠다. 여러 번의 설명과 설득에도 지유는 물러서지 않았다. 엄마와의 분리 불안이 극심한 아이이기에, 억지로 막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지유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검사를 받기로 했다.
간신히 뇌파 검사는 시작되었다. 단 5분만 참고 모니터를 바라보면 되는 검사였다. 간단해 보이지만, 지유에겐 그렇지 않았다. 마치 가시 박힌 의자에 앉은 듯, 혹은 불타고 있는 장작 위에 엉덩이를 붙인 듯 잠시도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이는 30초에 한 번씩 뒤를 돌아 내 존재를 확인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듯했다. 그때마다 바라본 지유의 얼굴은 불안과 공포 그 자체였다. 누군가 억지로 고문 의자에 앉힌 아이 같았다. 모두 불안 때문이었다. 이마에 붙인 전극 머리띠를 몹시 불쾌해하며, 영상을 바라보는 일 자체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엄마를 바라보지 못하게 한 상황 자체를 불안하고 무섭게 느끼는 듯했다. 아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동안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검사 결과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아이는 거대한 불안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무엇이 이 아이를 공포에 질리게 만든 걸까? 이곳은 그저 단순한 검사실이었다. 검사를 받고 아이의 성향과 상태에 맞춰 상담을 진행하려 했을 뿐이었는데, 모든 것이 나의 욕심으로 느껴졌다. 지유에게 못 할 짓을 시킨 것만 같았다.
검사 결과 지유는 극도의 불안 장애로 나왔다. 지유의 뇌파를 보여주는 색깔 도표를 보았다. 분홍색의 칼날 같은 사선들이 마치 거대한 벽처럼, 파도처럼 올라와 있었다. 유 선생님은 보통 사람의 뇌파를 비교하여 보여주었다. 검푸른색의 잔잔한 바다 같은 도표였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유 선생님은 지유에게 뉴로 피드백이란 뇌파 치료를 권했다. 그러나 우리는 뇌파를 검사하는 것만으로도 지친 상태였다. 더 이상 지유에게 전극이 붙은 머리띠를 착용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두려워하는 상담센터에 다시는 발을 들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유 대신 부모가 양육 상담을 받기로 하고 센터를 나왔다.
소아신경정신과 대기실에서 한 시간째 상담 기록지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 일 년 전의 그날이 그리고 삼 년 전의 날들이 떠오른다. 당시에는 괜찮을 거라고 넘어갔던 일이 오늘을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내가, 지유가 소아신경정신과를 찾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뇌파 치료를 받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유아였을 때 일찌감치 놀이치료를 받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아이의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치료법만 찾아다녔던 지난날이 가장 후회된다. 아이가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이해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증상을 소거시키려고 했던 안일함과 이기심이 후회된다. 소아신경정신과의 가느다란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파리한 얼굴은 불안해 보인다. 앞으로 지유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