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갈등이 터져 나왔다

by 민토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3개월을 스페인 시댁에서 살면서 크게 데인 뒤, 나는 스페인으로 가는 횟수를 일 년에 2-3번에서 1번 이내로 확 줄이고 가더라도 2주 이상 시댁에서 머물지 않았다. 아니면 스페인에 가더라도 아예 다른 곳으로 여행 갔다가 시댁에서는 1주일 정도만 보내고 돌아오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걸 못된 며느리의 행동이라고 비난할지 몰라도, 3개월을 보내면서 거의 매일같이 쌓였던 울분과 상처를 나 역시 달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고, 격리를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늦게 시작한 영국은 순식간에 모든 문을 닫고 사람들의 사회 활동을 제지하기 시작했다. 그때 아이를 가진 맞벌이 부부들이 다 그랬겠지만, 우리도 재택근무와 홈스쿨링을 병행하느라 매일이 바빠 죽을 지경이었다.


어느 지친 저녁. 남편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차피 영국에서는 집에만 갇혀 있는데 아예 스페인에 가서 일 년 정도 지내다 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을 들어보니 스페인에는 좀 더 엄격한 마스크 룰을 두는 대신, 학교나 상점들도 문을 열었다고 했다. 게다가 우리가 사둔 집은 작은 마을의 끝자리에 위치해, 사람들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바로 자연환경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무엇보다 남편은 스페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대화했고, 실제로 가능한 지 이것저것 알아봤고, 결국 결정을 내렸다.


내게는 스페인 시댁이 아니라 우리가 산 집에 머물게 된다는 게 가장 큰 결정의 이유가 되었다. 물론 홈스쿨링에 지쳐서 아이들이 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다는 것에 혹하기도 했고, 아이들의 스페인어 향상에도 좋을 거라는 지독히 맹자 엄마 같은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그렇게 모든 걸 결정한 뒤 알게 되었다.

시부모님도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도시에 있는 집을 두고, 우리가 산 집으로 와 계실 거란 걸.


다시 예전의 트라우마가 도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또 한 번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냥 쉬러 가는 게 아니라 내게도 일이 있으니까. 아이들도 학교를 가니까. 지낼 층도 나뉘어 있으니 그렇게 부딪힐 일이 있겠나 싶었다.


실제로 우리는 별로 부딪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편과 내가 하루종일 일하느라 위층에서 잘 내려오지 않아 얼굴 볼 기회 자체가 별로 없었다는 소리다.


잘 볼 일도 없고, 있더라도 무난하게 넘어가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순전히 우리 생각이었다. 아니, 나만의 착각이었다.


처음 시작은 남편이었다.


시부모님은 남편에게 컴퓨터를 봐달라, 뭘 좀 고쳐라 등등의 부탁을 종종 하셨는데, 남편이 회의일정 때문에 돕지 못하겠다고 말하면, 왜 남편이 회의를 그만두거나 미루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을 탓하셨다.

그렇게 남편과 시부모님 사이에 간간히 다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나는 눈치를 보며 거기에 휘말리지 않게 아이들을 데리고 배경에 묻어가려고 조용히 움직였다.


그다음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스페인어는 스페인 학교를 다니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문제는 아이들이 집에서 나와 함께 있을 때는 스페인어를 쓰기보다 영어나 한국어를 쓴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이 조잘조잘 하루에 있었던 일을 내게 떠들며 얘기하고 있으면, 두 분은,


"En español!" (스페인어로)


하고 소리치셨다. 그러면 아이들과 나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불만의 아래에는 내가 있었다.


바쁘다고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며느리. 먼저 다가와 대화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며느리. 아이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기는커녕 도리어 스페인어를 쓰지 않게 하는 며느리. 아들과의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어 주기는 커녕 도리어 거리감을 두게 하는 며느리.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며느리. 우리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며느리.....


스페인에 일 년 정도 있었지만, 시부모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 놀러 가거나,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봐주겠다고 하신 적은 없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도, 아이들도 기대하지 않고, 묻지도 않았다. 기대했다가 된통 얻어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했기에.


그런데 우리가 떠날 때가 가까워져서 그런지 웬일로 시부모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오시겠다고 먼저 제안하셨다. 우리는 어차피 짐을 싸느라 바빴기에 그 제안을 환영했지만, 뜻밖에도 아이들이 싫다고 거절했다.


아이들은 차라리 엄마랑 집에 있겠다고 말했고,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이런 기회가 흔한 게 아니라며 아이들을 달래서 보냈다.


집이 빈 틈을 타서 열심히 청소를 하고, 짐을 싸고 있는데 생각보다 빨리 아이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시부모님 표정이 영 좋질 않았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아무 일도 없었단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역시나 모르겠단다.


그날 오후, 아이들과 거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계속 언짢은 표정으로 계시더니 남편이 내려오자 화를 내셨다. 도대체 네 아내가 아이들에게 뭐라고 했길래 아이들이 조부모와 함께 있는 그 시간도 못 견디고 얼른 집으로 오고 싶어 했느냐고.


듣고 있자니, 아이들이 산책을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는데, 시부모님은 내가 아이들이 가기 전에 한 말을 못 알아들으시고, 대신 아이들더러 빨리 돌아오라고 말한 거라고 오해하신 듯했다.


남편은 오해라고 말했지만, 이미 나를 향한 불만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나와 아이들이 버젓이 있는데서. 이번에도 역시나 "Ella no entiende nada (쟤는 아무것도 모른다)"란 말을 곁들이시면서.


화가 난 남편이 언성을 높이자, 시부모님 역시 언성을 높이셨다. 아내 하나 간수 못하고 이 사단을 만든 아들에게도 단단히 화가 나신 듯했다.


아이들이 조심스레 내게 왜 할머니, 할아버지가 저렇게 화를 내시냐, 하고 묻고, 나는 차분한 음성을 꾸며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뒤,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내 안에서 곪았다가 터졌다를 반복했던 상처에 쐐기가 박힌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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