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한 사람을 규정하는 큰 요소 중 하나다.
표현하지 못하면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고, 표현하는 방식 역시 그 사람의 성격이나 사고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모국어가 그 사람이 자라온 환경이나 본래 성격을 반영한다면, 후에 습득하게 된 외국어는 그 사람의 성향이나 외국어를 습득하게 된 환경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아무리 고급스러운 영어를 구사하는 영국인이라도 부산이 좋아 한국에 간 사람이 사투리가 섞인 한국말을 배우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이들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영향을 받기도 하니 말이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내가 어떤 영어를 구사하고, 영국에서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는지 잘 모른다. 어떤 인간관계를 맺고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내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도 말이다.
영국에 있는 친구들 역시 내가 한국어를 사용할 때 습관이 뭔지, 한국 사람들과는 어떻게 대화하는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 인간관계에는 별 문제가 없다. 나는 그들과 명확하게 소통할 수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줄 수 있고, 그들이 내게 갖는 궁금증도 해소시켜 줄 수 있으니까.
스페인의 시댁 가족들도 내가 영국에서, 혹은 한국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나란 인간을 설명해 줄 수준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해외 생활을 하면서 나는 누누이 말이 서투르다고 그 사람이 멍청한 건 아니라는 소리를 수없이 해왔지만, 사람들은 종종 그 사실을 잊곤 한다.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걸 핑계로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을 내뱉고, 상처될 말조차 주저하지 않는다.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눈까지 멀어서 상대방이 보내는 모든 부정적인 바디사인을 못 읽을 정도는 아닌데 말이다.
무엇보다 말하기가 서투르다고 말도 못 알아들을 거라는 건 얼마나 안일한 착각인가.
생각해 보면 시댁과의 골 깊은 갈등은 바로 이 소통의 부재에서 시작되었다. 아니, 언어 이해의 불균형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차라리 시댁이 늘 말하는 것처럼 내가 아예 스페인어를 몰랐다면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이 모든 갈등을 그저 남얘기처럼 무덤덤하게 넘길 수 있었을까.
아니면 내가 스페인어를 너무 빨리 포기했나?
만약 내가 결혼을 하기 전에 좀 더 스페인 혹은 남미에 관심을 두고, 스페인어를 배우면서도 시댁이나 남편과 관련되지 않은 나만의 스페인 친구들을 만들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내가 스페인에 살다가 남편과 만났더라면 지금과 달랐을까.
그러나 나는 안타깝게도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스페인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고, 내가 스페인에 살았더라면 남편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남편 역시 스페인에 살고 있지 않았으니까.
매해 내 새해계획에는 스페인어 공부가 포함되어 있다. 영국에서는 일상에 치여서 작심삼일에 그치기 일쑤지만, 그래도 스페인에 가기 전 벼락치기 공부를 하긴 한다. 가끔 혼자 운전할 때, 스페인어 일주일 안에 정복하기, 따위의 제목이 붙은 CD를 틀어놓기도 하고, 스페인어로 된 책을 몇 줄씩 읽으며 공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에 도착하면 기분이 가라앉고 움츠러드는 나를 발견한다. 이곳에서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고, 빠르게 몰아치는 시부모님의 말을 100% 이해하지 못하며, 내 반응은 한 발짝씩 늦고 대답은 어눌하다.
그럴수록 소통의 벽은 견고해지고, 우리는 지친 한숨을 내쉬며 서로에게서 돌아선다. 그렇게 매년 우리는 서로 사이에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고 있다.
그렇게 쌓인 침묵의 벽 너머 갈등이 터지면, 나는 'Tu mujer' (네 아내)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을 일으킬 것 같은 기분에 벽 뒤로 도망쳐 숨어버린다. 그럼에도 귓속을 파고드는 단어의 조합들이 착실히 의미를 만들어 내게 상처를 내는 걸 그저 견디며 말이다. 그러다 못 견디면 한 번씩 앓아눕고.
뭔가 전환점이 필요한 거 같긴 한데,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정말 내 스페인어가 완벽해지면 해결될까? 그날이 오면 우리는 정말 위대한 이해와 화해의 강을 건너, 내 안에 응어리 진 이 감정들도 다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건 소통의 문제가 아닌 그냥 관계의 문제인 건가.
사실 잘 모르겠다. 아니면 모른 척하고 싶은 걸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