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혼, 이래서 어렵다

by 민토리

결혼은 두 사람을 폐쇄적 공동운명체로 묶어놓는 효과를 발휘한다.


닫힌 문 안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만의 내밀한 사정은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다 알기 어렵고, 공동체로 묶긴 두 사람은 공범자들이 그러하듯 개인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상대방의 치부에 대해서도 보통은 침묵하게 된다.


우리는 한배를 탔다는 공적인 선언을 한 뒤, 그 배가 침몰하든, 아니면 탑승인이 죽어버릴 때까지 그 배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나눠가지고 항해를 함께 해나가야 하는 거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면 그 배가 두 사람만의 도피처이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못할 요새처럼 느껴졌겠지만, 항해가 시작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군가는 노를 저어야 하고, 두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다 사정은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만의 항해를 계속하다 보면 저절로 주위 상황에 눈을 돌리게 된다.

우리 꽤 잘하고 있는 거 같은데, 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혹은 이건 아닌 거 같은데 다들 이렇게 사나, 싶은 의심과 혼란함에.

그게 아니더라도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에, 다툼으로 번질까 봐 차마 서로에게는 말하지 못한 자잘한 불만들을 안전하게 털어놓고 맘 편해지고 싶어서.


그런 다양한 이유들로 우리는 간혹 배 사정을 외부에 알리기도 한다.

회사 생활이 거지 같아도 친구들과 모여 수다도 떨고, 술 한잔 하면서 상사 욕도 좀 하고 그러면 어느 정도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국제결혼은 좀 사정이 다르다.


일단 배의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 배에 타는 순서 혹은 절차부터 각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니 당연히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결혼 생활도 제각각이고, '다들 이렇게 산다더라'라는 기준점이 모호해진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남자가 육아 휴직을 공평하게 쓰는 게 당연한 일일 수 있고, 어떤 문화권에서는 제도적으로 그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그 요소가 될만한 원인들이 더 추가된다. 이게 두 사람의 성격 차이인지, 자라난 환경 혹은 가족의 분위기 때문인지, 문화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언어를 사용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인 건지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확 늘어나는 거다.


특히 의사소통의 갭은 확실히 존재한다. 두 사람이 아무리 현지인 수준의 외국어를 쓴다고 해도, 둘 다 그곳에서 자란 게 아니라면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성격뿐 아니라 모국어의 영향 또한 받기 때문이다. 스페인 사람인 남편의 영어가 좀 더 직설적이고, 내 영어가 좀 더 두리뭉실하고 모호한 것처럼 말이다.


한 사람이 모국어를 쓰고, 다른 사람이 배우자의 모국어를 배워서 쓰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비슷하다. 외국인이 현지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내부에 깔린 정서까지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모국어를 구사하는 현지인 역시 배우자가 하는 자신의 모국어를 알아들을 순 있어도 상대방의 모국어가 자신의 모국어로 전환되는 과정까지는 다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말이다.


또 하나. 둘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이걸 외부에 설명하기도, 이해받기도 어렵다. 공감 요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페인 남자를 남편으로 둔 다른 유럽인 친구와 얘기할 때, 친구는 '스페인 사람'과 관련된 어려움에 대해서는 공감했지만,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생겨난 갈등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 영국인 친구들과 한국인 친구들은 결혼과 육아에 관한 대체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공감했지만, 우리가 국제 커플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국제 커플들과 얘기를 해봐도 사정은 비슷하다. 다들 어디서도 공감받지 못할 문제를 하나씩은 안고 사는 거다.


그리고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결혼은 두 개인만의 결합이 아니다. 우리의 배는 실상 이미 다른 기존의 배들과 연결된 선을 주렁주렁 달고서 항해를 시작한 거다. 그게 가족들이든, 친척이든, 친구들이건 간에.


국제결혼은 규격도, 모양도, 크기도, 색깔도 제각각인 배들과 함께 낯선 바다에서 항해하는 것과 같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익숙해져서 평소에는 그 차이도 못 느낄 정도로 무난히 넘어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혼자 고립된 듯 외롭다. 심지어 함께 배를 탄 남편이 곁에 있음에도 그렇다.

지금 내가 쏟아내고 있는 이 글들과 감정을 그는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항해를 계속한다.

낯선 언어가 나를 할퀴고 지나가도 아무렇지 않은 척 꼿꼿이 허리를 펴고 선다.

반박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속을 찔러 대고, 높아지기만 하는 오해와 소통의 장벽에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그래도 매번 도전을 하긴 한다.


어쩌면 원래 바닥이 없는 통을 수리하겠다고 무리한 노력을 하는 걸 수도 있다.


우리 사이 소통의 장벽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고, 우리는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결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계속 엇갈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남편이 어떤 날에는 진짜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많나, 싶을 정도로 낯설어 보이기도 하고, 여전히 시댁은 어렵고 갈등의 골은 좁아질 기미도 안 보인다.




혹시 국제결혼이 이렇게 어렵지만 그래도 할 만합니다,라는 말을 기대하셨나요.


결혼 생활이 10년이 넘었는데, 글쎄요.

이전 글에 쓴 것처럼 분명 어느 순간에는 국제결혼을 해서 차라리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긴 합니다. 이건 국제결혼을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결혼이란 것 자체가 이런 게 아닐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회사에서 프로젝트만 하나 같이 해도 그 사람의 성격, 인성, 사고방식 같은 게 다 드러나서 갈등이 생기곤 하는데, 아무리 사랑이라는 매개체가 있었다 해도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매일 부대끼면서 일상을 공유, 유지해야 하는데 그 매일이 늘 화사한 봄날인 게 이상한 거 아닐까.


대신 한 가지 생각만은 시간이 갈수록 자꾸 송곳처럼 뾰족하게 벼려져 나오기에 다짐하는 게 있긴 있습니다.


내가 딱히 귀하게 자란 사람은 아니지만, 나한테는 내가 제일 귀하니 참고 살지 말자.

가족의 평안을 위한 희생이니, 그런 소리 집어치우고, 뻔뻔해지자.


가족에게 그렇게 시달리다 아예 외국으로 나와 우여곡절 끝에 이제야 온전한 내가 되었는데, 그 '가족'이란 말이 뭔지, 이제는 내 가족도 아닌 남의 가족에게 굳이 다른 언어로 상처받고 또 혼자 참고.


습관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런 의미로 저는 조금 더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이 어려운 항해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안되면 말지, 뭐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도 속으로 꽁꽁 다져놓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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