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내가 케임브리지를 떠나 웨일스 지방으로 이사한다고 했을 때 친구들이 우리에게 건넨 선물 중에는 예상외의 선물이라 지금도 기억나는 두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The National Trust membership (자연과 문화유산 보존과 보호를 위해 설립된 비영리 단체로 다수의 유적지나 성, 저택과 정원 등을 소유하고 있다. 잘 알려진 스톤헨지 역시 내셔널 트러스트에게 관리하는 곳 중 하나다.)
그리고
Cadw membership (Welsh heritage membership – 위의 내셔널 트러스트가 영국 전 지역을 살핀다면, 이 단체는 웨일스 내의 문화 유적을 관리한다. National Trust에서 관리하는 곳들보다 입장료가 싸고, 오래된 고성 종류가 많다. Great Britain에서 두 번째로 크고, 웨일스에서는 첫 번째로 큰 Caerphilly Castle도 이곳 소속이다)
그 선물을 받고서 그 당시에는 친구들에게, “This is very English” (정말 영국인답다)라고 농담하며 웃었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영국인들이 원래 그래서라기보다, 그 당시 친하게 지냈던 영국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에는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영국인들은 다들 그럴 거라고 쉽게 일반화해버렸지만 말이다.
Jeremy Paxman이 쓴 ‘The English: A portrait of a people’ (1998)이란 책을 보면 National Trust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Stand in the middle of a High Street in the Surrey stockbroker belt and allow the crowds of Saturday morning shoppers to drift past. Count them as they pass, and look closely at every seventh person. Statistically, you will have found a member of the National Trust (p.152 - 토요일 오전에 서레이 – 런던의 남동부에 위치한 지역 -의 번화가에 서서 사람들을 지나가게 해라.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를 세다가 그중 일곱 번째 지나가는 사람을 잘 관찰하면, 통계적으로 그 사람은 내셔널 트러스트의 멤버일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Surrey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다.
오십만 파운드 (half a million, 한화로 9억 정도) 이상의 질 좋은 목재로 지어진 Edwardian 맨션 (1900년도 초기의 건축 양식으로 빅토리안 시기에 지어진 집들보다 방 사이즈가 크고, 천장이 높으며, 붉은 벽돌과 외부의 나무 장식이 인상적이고, 정원이 있으며, 주로 교외 지역에서 중산층들이 살던 주거 형태)이 있고, 잘 관리된 골프코스와 끝없는 행렬의 보수당 (Conversative party) 의원을 가진 ‘wealth country’ (부유한 나라/지역).
이곳에서 유달리 내셔널 트러스트의 멤버들을 자주 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곳에 사는 부유한 이들의 취미가 ‘과거를 보존하는 것 – preserving the past’이기 때문이라고.
이런 현상은 Surrey 뿐만 아니라 West Sussex (Surrey 남쪽 지방. Portsmouth (포츠머스)와 Brighton (브라이튼)의 중간 지역), 그리고 잉글랜드 북서쪽에 위치한 서레이의 사촌 격인 Cheshire (체셔 지방 – Chester가 위치한, 맨체스터와 리버풀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위에서 말한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영국의 옛 모습을 현재까지도 대체로 유지하고 있는 곳들이다. 구릉진 언덕과 잘 가꾸어진 정원과 옛 모습을 간직한 저택들이 즐비한 전통적인 영국의 빌리지 (English Village).
한국에서는 시골과 도시,라는 구분이 익숙했기에, 나는 예전까지만 해도 이 ‘English village’를 영국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웨일스의 Valley로 이사 간 뒤에야 그게 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Valley, 한국말로는 ‘골짜기’로 지형적인 구조를 뜻하는 말이지만, 웨일스에서 The Valleys라고 하면 지형적으로는 카디프 (Cardiff)와 뉴포트 (Newport)의 북쪽, 브레콘 비콘 (Brecon Beacon) 국립공원의 남쪽, 동쪽으로는 아베르가베니 (Abergavenny), 서쪽으로는 스완지 (Swansea)를 경계로 둔 지역으로 예전에 석탄 광산 등으로 산업화된 지역을 뜻한다.
동명의 티브이 시리즈가 제작될 정도로 웨일스 남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곳인데, 워킹클래스가 밀집되어 있고, 인구 이동률이 현저히 낮으며, 낙후되고 빈곤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곳에 살면서 여러 군상을 만났는데, 16살에 임신한 여자 아이들은 물론이고, 30대에 이미 20대인 자녀가 있거나, 40대에 조부모가 된 사람들도 허다하며, 7명의 배다른 형제자매가 있다는 사람도 만나봤고, 버스를 탈 때 혹시 여기에 나만 모르는 교통 카드가 따로 있나 착각할 정도로 정부 지원금을 받는 사람의 수가 압도적으로 높고, 날 좋은 날 공원에 가면 웃통을 까고 맥주병을 들고 다니는 사람 수가 많은 곳이다.
유럽 연합의 지원을 가장 많이 받는 지역 중의 하나면서 브렉시트에 가장 많은 표를 던진 지역이기도 하고, 산업화 당시 석탄 광산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이민자였던 이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면서, 지금은 외부인에게는 지극히 배타적인 지역이기도 하다.
똑같은 시골 마을이면서, 잉글랜드에서는 도시 근처에 워킹클래스나 이민자들이 밀집되어 살고 있고, 시골 마을로 벗어날수록 중산층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적어도 웨일스 남부에서는 같은 시골마을이라도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그럼 잉글랜드라고 다 똑같은가?
그렇진 않다. 위의 책에서 소개한 것처럼 잉글랜드에도 북부와 남부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Edward Thomas의 ‘The South Country’ (1909)란 책에서는 그 지역에 대한 애정이 넘쳐난다. 푸른 들판과 잔잔하고 평화로운 마을, 길거리에 심어진 나무 하나까지 묘사하며, 그렇게 말한다.
These are the ‘home’ countries (Ch.1) (이곳이야 말로 고향의 나라다)
반면 독일 철학자 Friedrich Engels는 산업화로 급격히 발달한 잉글랜드 북부의 도시들을 여행하며, ‘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 (1845)’라는 책을 펴냈다.
찰스 디킨스의 'Hard Times' (1854)에 나오는 가상 마을인 Coketown은 북부의 프레스톤 (Preston)과 맨체스터 (Manchester)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졌는데, 이런 설명이 나온다.
It contained several large streets all very like one another, and many small streets still more like one another, inhabited by people equally like one another, who all went in and out at the same hours, with the same sound upon the same pavements, to do the same work, and to whom every day was the same as yesterday and tomorrow, and every year the counterpart of the last and the next’ (Book 1, Ch 5 - 그곳에는 여러 개의 매우 비슷한 큰 거리와 작은 거리들이 있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소리를 내어 거리를 걷고, 같은 일을 하러 가는, 매일이 어제와 내일도 같은 매년을 살아가는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묘사가 딱히 낯설지 않은 이유는 바로 현재에도 영국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달라진 점이라면 거리에 줄지어 있던 테라스 하우스 (Terraced house)가 고층으로 올라간 아파트로 변신하고 있다는 점이랄까?
영국은 변화가 더딘 곳이다.
동시에 변화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민족이란 생각도 든다.
아니면 산업혁명의 선두주자로 그 급격한 변화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 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여행 작가였던 HV Morton이 쓴 책 ‘What I Saw in the Slums’ (1933)에서는 산업화로 발달한 북부 도시 Leeds에 대해
To be frank, the whole of Leeds should be scrapped and rebuilt…. It is a nasty, dirty old money box (솔직히 말하자면, 리즈 도시 전체를 다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한다. 그 도시는 끔찍하고 더럽고 오래된 돈 상자다. P. 37-9)
라고 말했고,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작가 D.H. Lawrence는 자신의 고향인 노팅엄 (Nottingham)에 대해 1929년 쓴 에세이 'Nottingham and the Mining Country'에서 이렇게 말했다.
The great crime which the moneyed classes and promoters of industry committed in the palmy Victorian days was the condemning of the workers to ugliness, ugliness, ugliness (빅토리아 시대의 번영기 동안 자본가와 산업화의 우호자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노동자들을 추악함 속으로 내몬 것이다)
그 후에도 ugly란 말이 몇 번이고 반복되어 나오니 얼마나 그가 산업화로 변해버린 노팅엄의 모습을 싫어했는지 글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산업화로 발달한 도시들은 현대사회에서 문화와 예술, 다양성 등을 강조하며 나름의 살길을 찾아가고 있는 듯 하지만, 영국의 많은 지역들은 여전히 과거의 잿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체 낙후되어 고인 물처럼 굳어 있다.
그에 비해 돈이 있는 중산층들은 공기 나쁘고 칙칙하게 변해버린 도시와 이젠 낙후된 지역을 버리고, 공기 좋고 정원을 가꿀 수 있는 한적한 마을로 빠져나와 산업화 이전의 영국을 만들어간다.
그들은 주말이면 상류층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며 영감을 얻고, 그렇게 오래된 영국의 가치를 유지해 간다.
그 와중에 몰락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상류층은 역시 남들에게 개방되지 않은 자신만의 성에서 살고 있고.
그 때문인지 영국에서 지역차란 곧 계급차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지역에 따라 집의 형태가 바뀌고, 정원의 모습이 다르며, 번화가에 들어서는 상점이나 음식점의 종류와 질이 달라지고, 결과적으로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이 달라진다.
그렇게 모이는 사람들에 따라 지역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공기가 달라지며, 문화가 달라진다.
잘 정돈된 산책로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정원을 가꾸는 이웃과 인사하고, 근처 공원에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피크닉 나온 가족들로 붐비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깨진 유리조각이 남발하고, 제대로 치워지지 않은 쓰레기통에서 악취가 스며 나오고, 담배냄새와 찌든 내가 풍기는 버려진 공원이 있는 지역이 생기는 거다.
당연히 그런 지역의 차이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달라지고, 돈이 있는 중산층은 선택지가 다양하니 당연히 후자에 해당되는 지역을 피해 가고, 그러다 보니 후자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돈이나 선택지가 적은 워킹클래스, 혹은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사회적 약자 혹은 이민자들이 들어서게 되면서 또 악순환이 이루어지는 거다.
영국인들의 많은 수는 이런 계급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려한다. 그건 구시대적 산물이라고, 요즘에는 누가 그런 걸 따지냐고 말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살다 보면 보지 않으려고 해도 ‘계급’이란 게 피부에 선명하게 닿을 정도로 느껴지니, 이걸 무시하기도 어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