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서울역 나들이

by Soo

아침부터 부산스레 움직였다. 지난밤에 잠을 거의 못 잤지만 알람도 신경 써서 듣고 늦지 않게 일어나 아이들을 준비시켰다. 평소와 달랐던 것은 다른 동생들이 듣지 못하게 첫째에게 귓속말을 했다는 것이다.

ㅡ방과 후 수업(시니어 육아 사전ㅡ초딩들이 분기별로 학기 중에 방과 후 특별수업을 듣는데 분기 내 방학 동안에는 아침 일찍 수업을 한다) 끝나고 엄마랑 엄마 친구들 만나러 갈 거야. 읽을 책 두권만 가방에 집어넣어. 수업 끝날 시간에 엄마가 데리러 갈게. 엄마랑 지하철 타자.

그러나 귓속말이 무색하게 요 큰 놈이 반색을 하며 되묻는다.
ㅡ나도 엄마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요???

둘째, 셋째가 심각해진다.
ㅡ나는요? 나도 가요? 나는 안 가요?

끙. 일이 커지기 전에 단호박처럼 대답했다.
ㅡ너희는 어린이집 가서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아야지.
단순한 놈들. 곰새 수긍하고 입던 옷을 계속 입는다.

그렇게 출근들을 시키고 잰걸음으로 집에 와 폭풍처럼 빨래를 널고 바닥을 훔치고 가방을 싸고 얼굴에 오래간만에 무엇인가를 찍어 바른다. 세상에, 꽤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아 지저분해진 산신령 같은 눈썹을 정리하고 입술에 색깔을 입혀보고는 생각한다. 조금 더 부지런 떤다면 매일 이 정도는 덜 못생길 텐데.

그렇게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서 큰 놈의 학교로 걸어간다. 품에 안긴 막내는 두리번두리번하며 찬 공기에 자꾸 얼굴을 내민다. 엄마의 색 있는 얼굴도, 엄마의 들뜬 기분도 왠지 낯선 것일까.

이제 곧 2학년인데 엄마가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어지간히 좋은가보다. 헤벌쭉 웃으며 뛰어나오는 큰 놈의 손을 잡고 오랜만에 같이 지하철을 타러 갔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나고 그런 건지 자꾸 광고간판 글귀를 읽고 난리다. 지하철에선 비워진 임산부석에 앉으라고 옆에 있는 할머니가 몇 번이나 권했는데 요 녀석, 다리 안 아파요 하며 딱 자르고 엄마더러 앉으라고 한다. 엄마도 못 앉지. 아기는 안았지만 더 이상 임산부가 아니니.

약속 장소는 서울역. 20분 정도 지하철을 타고 도착해서 만나기로 한 뷔페식당으로 갔다. 고개를 빼고 찾아보려는데 쩌어기서 누가 손을 있는 대로 흔든다. 이제 거의 20년이 돼가는 대학 동기들이다. 언제 봐도 그대로인 얼굴들이다.
나는 애가 넷, 한 명은 애가 셋, 또 하나는 뱃속의 아기까지 둘이다. 큰 놈을 어릴 적부터 봐오고 예뻐해 주던 친구들이라 반갑게 맞아준다. 머쓱하게 인사하는 큰 놈을 앉히고 잠든 막내를 내려놓으니 친구들이 막내를 보며 호들갑들을 떨어준다.

금강산도 식후경. 음식을 먹으면서 마치 어제도 만났던 것처럼 재미진 것들을 떠들기 시작한다. 꺄륵꺄륵 웃으며 간혹 나오는 육두문자들은 귀가 열린 9세를 위해 묵음처리를 하며 계속 떠든다. 아기 때부터 우리 큰 놈을 유독 아껴주던, 뱃속에 둘째를 품은 친구는 큰 놈을 데리고 이것저것 먹을 것을 가지러 갔다 왔다. 큰 놈은 먹기도 잘 먹고 다 먹고 나서는 챙겨 온 책을 꺼내 읽기도 하고 그랬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울 때까지 막내도 잘 자주 었다.

신나게 먹고 떠들다가도 문득 친구들은 나한테 애쓴다, 힘들지 하는 말들을 건낸다.

스무 살 한창 예쁘고 멋대로 살 시기에 만났다. 그땐 무서울 것도 없고 괴로울 것도 없이 매일이 신나고 즐거웠다. 공부도 노는 것도 너무 재밌었던 그때는 우리가 어디에서든 한 자리 차지하며 멋지게 살 줄로만 알았다. 그런 때의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이었다. 그런 내가 애를 이렇게 많이 낳아서 이러고 사는 게 낯설고도 짠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내가 깨서 챙겨간 먹거리를 먹이고 났더니 서울역사의 음식점이 대개 그렇듯 대기인원이 많아 어떻게 갔는지 모를 2시간이 지나 자리를 떴다.
애 셋을 키우는 친구가 카운터로 막 가버린다. 그러면서 자기가 내야 한다며 딸이 줬다는 상품권 같은 걸 꺼낸다.

응? 만 원짜린데? 십만 원도 아니고 만 원짜린데?

그 순간이 웃겨서 또 꺄르륵 웃었다. 묵묵히 계산을 하는 친구에게 잘 먹었다고 넉살을 떨지만 분명하게 알 것 같았다. 그냥 맛난 밥 한 끼 먹이고 싶었을 거라고.

차 한잔 하며 또 떠들고 또 내일 만날 것처럼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집에 오는 길에 큰 놈은 엄마랑 지하철 타고 다니는 게 좋았다며 말하지만 수시로 몇 정거장 남았냐 물으며 9살 답게 굴었다.


너는 모르겠지. 엄마는 오늘 17년 전으로 몇 번이나 다녀왔어. 그 이모들과 캠퍼스를 누비면서 배꼽이 빠지게 웃고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젊음의 모든 것을 이야기했던 그때로. 그리고 돌아가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그러면 너희를 못 만났겠지 생각하며 아서라 한단다.

그래도 오늘 밤에는, 꿈에서라도 한 번은, 더 가보고 싶단다.
아무런 걱정 없이 그저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하루를 살면 되었던, 엄마의 스무 살 그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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