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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dia Youn Apr 07. 2020

내가 어려서 나를 떠난다고 했던 당신에게

나도 운전을 하게 되었다는 거, 당신도 알려나?


 당신은 운전을 해야 하는 사람이고 나는 그 옆에서 졸린 눈을 떠야 하는 사람이잖아. 졸려도 졸리지 않은 척 눈을 떠야 하는 거, 당신도 누군가의 차에 타봐서 알잖아. 옆자리 사람이 잠들지 않고 떠들어주거나 혹은 적어도 눈이라도 뜨고 있어야 한다는 거. 그게 같이 잠들지 않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란 거, 당신도 알지?

 우리 관계의 운전대를 쥔 게 당신이란 거 나도 잘 알아. 사실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기도 해. 운전대를 쥐었다고 해서 당신이 나의 주인이라는 건 아냐. 난 언제든 당신의 차가 너무 위험해 보인다면 내가 다른 차를 운전할 수도, 다른 운전자의 차에 탈 수도 있어. 전에는 면허증이 없었지만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면허증을 땄거든.

 당신, 내 면허증 본 적 있던가? 본 적이 없는 것 같고 사실 볼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당신은 내가 아무 말 없이 졸린 눈을 몰래 감았다 뜨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도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그리워하는 것 같더라고. 하지만 난 면허증을 땄는걸.

 당신, 혹시 기억하려나? 당신이 운전도 할 수 없을 만큼 취했을 때 나를 찾아왔던 몇 년 전 말이야. 운전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는 어디서 술이 잔뜩 취해서는 나를 찾던 당신이 참 밉더라. 나, 사실 당신이 그때 다른 여자들도 태우고 다닌다는 거 알고 있었어. 그때는 나 말고도 다른 여자가 채워줄 수 있는 자리구나 싶어서 당신을 떠났거든.

 당신은 알려나? 아마 기억 못 하는 것 같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가? 근데 나는 기억이 나는걸. 당신은 아마도 그때, 내가 너무 어리다면서 몇 년 뒤에 만나자고 했었던 것 같아. 아마도 그땐 지금의 나 같은 여자에게 빠져있었으려나?

 늦었다고 말해주고 싶거든. 난 면허를 땄고, 우리는 함께하기엔 같이 취하고 사고를 칠 사람들이거든. 나도 사고를 치는 게 더 재밌다는 건 알지만 이제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아. 당신을 만날 때면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좋아. 당신은 그대로인데 나만 바뀐 것 같네. 아니면 난 아직도 당신보다는 어린아이어서 당신이 똑같은 사람일 거라 착각하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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