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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Nov 01. 2020

쓸 만한 여행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직장을 그만두고 우발적으로 떠난  여행. 성한 곳이라고는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부실한 몸뚱이를 이끌고, 어쩌자고 그토록 긴 여정을 떠날 마음을 먹었던 것일까? 생각이 많았다면 떠날 수 없었을 여행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길 위에서 병은 온데간데없었다. 여행은 내 등을 떠밀었다. 아침에 일어나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걷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떤 날은 3만보를 걸었다. 패딩점퍼 하나 없이 북부 고산지대 만년설산을 다니면서도, 매년 한 번쯤 심하게 앓던 그 흔한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나를 치유했다. 길 위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방랑객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저마다의 시련과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 각자의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삶은 경쟁이 아니라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위험은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위험은 내 안에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길이 펼쳐졌다. 권유로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게는 큰 도전이었다. 잊기 전에 기록하려고 스스로를 채근하며 썼다. 친구에게 조곤조곤 들려주는 여행 이야기처럼 쉽게 쓰고자 했다. 80일간의 여행기를 쓰는 데 80일이 꼬박 걸렸다. “글을 쓰는 일을 정말 좋아해서, 글 쓰는 순간 그 자체가 이미 제겐 보상이예요.” 어느 작가의 말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글쓰기가 제일 어려운데.’ 그 어려운 길을 통과해, 꼬박 1년 만에 내 생각을 말하고 쓸 수 있는 나를 회복했다. 어디라도 가야했던 그 때, 죽기 싫어 도망갔던 여행이 내게는 구원이 되었다. ‘쓸 만한 여행’이 되었다.


여행만큼 그 사람을 잘 설명해주는 것은 없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자고, 무엇을 구입할지 결정해야 하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 결과는 지극히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다. 무작정 쏘다녔다 생각했던 여정에서 나의 경험과 관심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여행기로 묶고 나니 비밀 일기장을 들킨 것 같은 당혹감이 들기도 한다. 정치로부터 도망갔던 여행에서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온통 정치적인 것이었다. 이 책은 어느 정치 덕후가 애정을 갖고, 그러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근접 관찰한 오늘의 중국 이야기로 이해해주어도 좋겠다.


신세지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기에 담긴 주제는 그간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분야로 가득하다. 호도협 트래킹을 하면서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나서 고향 제주에 올레길을 개척한 서명숙 이사장을 떠올렸다. 뎬웨철로를 보면서는 철도 덕후로 여러 권의 책을  현직 기관사 박흥수 선생이 생각났다. 식물학자 조셉 록에 주목하게  것은 아마도 따뜻한 시선으로 식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식물세밀화가 이소영 작가의 영향이리라.  브런치북에는 그간 많이 소개된 소수민족 이야기보다 신이민자 이야기를 많이 넣었다. 1990년대부터 수차례 중국 서부를 답사하고 윈난 소수민족과 자연에 대한 글을 썼던 사진가 이상엽 선생 같은 분이 있었기에 나는  다음 걸음으로 나아갈  있었다.


윈난에서 만나고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담지는 못했다. 여기에 싣지 못한 이야기 거리는 언젠가를 위해 남겨두려 한다. 팬더믹이 끝나 나면 사람들과 마주 앉아 신나게 수다를  모험담이 될까? 함께 배낭을 메고  곳에 가게 된다면, 동행들에게 들려줄 한정판 가이드가 될지도 모르겠다.  때까지 모두의 안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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