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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띠정 Jan 25. 2025

사라진 나의 테크노피아

그리운 그 시절

'찰칵찰칵'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소리가 리듬을 타며 들려왔다. 영국 버밍엄에서 지내던 남편과 나는 방학을 이용해 런던을 여행하고 있었다. 우리 둘은 템즈 강변을 따라 걷다가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에 멈추어 섰다. 신혼 때부터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던 삼성카메라를 꺼내어 서로를 카메라에 담았다. 검은색 커다란 필름 카메라의 '찰칵 치지직' 소리를 듣다가 순간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든 영국 런던의 한 복판에서 필름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이는 우리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세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은 도시는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가 꼽히던 때라 어마어마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카메라에 영국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디지털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테크노피아의 세상으로.


어느 날 우리도 삼성 디지털카메라로 갈아타고 있었다. 그 당시 막 유행이 시작된 싸이월드에 가입해서 도토리를 모으고 집을 꾸몄다. 컴퓨터 속 나의 예쁜 집을 꾸미고 또 꾸미며, 디지털카메라에 담은 사진을 노트북으로 옮겼다. 그 사진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 싸이월드에 정성껏 올리면서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근황을 전했다. 지금 나는 싸이월드에 정성껏 보관해 둔 사진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복원하지 못한 채 내 소중한 추억을 멀리멀리 날려 보내고 말았다. 나의 오랜 친구 싸이월드가 그리울 뿐이다.

필름카메라도 위치를 잃고, 이미 그 존재 의미도 잊힌 지 오래다.


종이 편지만을 쓰다가 내가 처음 이메일주소를 만들어 온라인으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할 때는 호산나넷을 사용했다. 내 아이디는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 아쉽게도 호산나넷(hosanna.net)은 내가 다음(Daum)의 한메일(hanmail)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영영 멀어져 버렸다. 내가 아끼던 이메일이 있는데도 그대로 소멸되고 말았다. 지금은 거의 네이버(naver)만 사용하게 되었으니 언젠가 다음(daum)과도 작별하는 날이 오리라.


그보다 더 이전에 나는 무선호출기 삐삐를 신기기로 받아들였다. 삐삐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1번을 누르면 숫자 메시지를, 2번은 음성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다. 암호를 숫자로 보내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음성메시지를 마음에 들 때까지 소를 반복해서 최종 메시지를 남길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썸을 타거나 마음에 호감을 갖고 있는 이성과 음성메시지를 남기며 소통하는 것은 꽤 짜릿하고 스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 삐삐 번호에 전화를 걸어 3번을 누르면 내게 남겨진 음성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터져 오르는 궁금증을 잠재우며 최대한 침착하게 마음을 정돈시키고 3번을 눌렀다. 남겨진 음성메시지를 들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서. 진실로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을 붙들어 매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메시지를 들었다. 때론 반복해서 두 번 세 번, 열 번을 들을 때도 있지 않았던가.


또한 내 번호로 전화를 걸면 인사말과 컬러링 음악을 저장할 수도 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마이마이에 테이프를 넣고는 수화기 곁에 두고 음악을 켤 준비를 했다. 음성으로 인사말을 남기면서 마이마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잘 저장되도록 스피커를 수화기에 최대한 가까이에 붙였다.

이 작업은 꽤 많은 정성을 필요로 했다. 인사 멘트를 메모장에 적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여러 차례 연습을 마치고서야 마침내 수화기를 들어 녹음을 시작했다. 그것도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 얼마나 낭만적인 소통 도구였던가?


현대에 취직한 남동생이 어느 날, 걸리버 핸드폰을 가져와서 선물로 건넸다. 삐삐의 시대가 물러가고 핸드폰 시대가 도래했다.

나는 현대 걸리버 핸드폰에 018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를 갖게 되었다. 그  018 번호가 좋았다. 어디든 가방 속에 집어넣고 들고 다닐 수 있었던 핸드폰을 사용하면서 낭만을 남겨주던 삐삐는 잊혀 갔다.


2004년 영국으로 떠날 때까지 나는 018 번호를 사용했다. 그 시절 내가 사용하던 다이어리에는 011, 016, 017, 018, 019로 시작되는 번호만이 지금껏 남아있다.


2009년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 나와 가까웠던 지인들과 친구들의 전화번호가 모두 바뀌어 있었다. 이메일도 호산나넷을 사용하다가 떠난 후 내가 돌아왔을 때는 호산나넷을 이용하는 이들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그 이후로 소식이 끊어진 옛 친구들이 있다. 전화번호의 시작 번호가 모두  010으로 바뀌고, 가운데 숫자가 세 자리에서 네 자릿수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언젠가 다시 나의 그 옛 친구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며 인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부디 꼭 언젠가는 연락이 되기를. 나의 친구들 정희, 선숙, 숙자, 수영, 유하, 지영, 최재덕 교수님. 모두 다시 만나고 싶은 이들이다.


나도 한국에 오자마자 010으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를 개통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2011년에 인도로 떠날 때는 내 전화번호를 해지하고 인도 전화번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막 카카오톡이 보편화되고, 인터넷 전화 070 번호가 널리 알려진 때라 우리도 한국에서 개통한 070 인터넷 전화를 들고 인도로 들어갔다. 카카오톡 영상통화는 나의 고단한 타국생활에 큰 위안을 주었다. 070은 카카오톡에 점점 밀려 나중에는 쓸모가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이제 반갑지 않은 번호로 인식되어 버렸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처음 내가 인도에 들어갈 때만 해도 막 스마트폰이 보급되는 시기였지만, 인도에서는 대부분 2G 폰으로 전화를 걸고 받고, 문자메시지를 전송하는 전화만이 통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 사람들의 손에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려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스마트폰은 인도를 송두리째 바꾸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저가의 스마트폰으로 그들만의 세상에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놀랍도록.


내가 다시 한국에 와서 전화번호를 개통할 때는 나의 옛 번호가 주인 없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중간에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가 해지되고 내가 올 무렵에는 날 위해 예비되어 있었다. 나는 오래전 내가 사용하던 같은 번호를 다시 만났다. 아주 오래된 나의 옛 친구를 기적적으로 상봉한 것처럼 말이다. 그 번호는 지금 내 번호가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가장 큰 신천지 테크노피아로 나를 이끈 것은 남동생이 공대에 입학하면서 장만한 데스크톱 컴퓨터였다. 파란색 모니터를 켜고 한컴 타자연습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매일 기록을 경신했다. 덕분에 나는 한글과 영문 자판을 완벽하게 외웠다.

남편이 유학생활을 하던 영국 버밍엄대학교에는 도서관 컴퓨터에 한글 자판이 없었다. 그나마 컴퓨터에 한글 프로그램이 깔려있어서 영어 키보드자판으로 한글 문서를 작성하고 편지를 쓰곤 했으니 나의 자판 타이핑 실력은 꽤나 좋았던 거 같다.


나는 그때부터 테트리스나 핵사 같은 게임을 즐기기도 하며, 문서 작업뿐만 아니라 조금씩 컴퓨터의 세계로 스며들어 가기 시작했다.


세상은 급변하고 나는 그것을 따라가기가 버겁다. AI는 나보다 능력이 뛰어나며, 나는 헉헉거리며 흉내라도 내보려 하지만 여전히 역부족이다.


"나는 아날로그가 좋아요!"


이렇게 외치고 과거 속 나의 테크노피아에 머물고 싶다. 미래의 세상을 과연 나는 쫓아갈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하다.

모든 것을 핸드폰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세상에서 내 손 안의 핸드폰에게 부담감을 느끼는 건 왜일까?

어쩌면 나보다 나를 더 정확히 파악하고 관찰하는 이 작은 스마트폰이 앞으로 어떻게 더 변화되어 갈지 궁금하기만 하다.


나는 어떤 테크노피아를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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