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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언 Oct 25. 2022

잘 놀았다, 이제 가자

10/22 명상일기

파도에 떠밀려 해안가에 도착했다. 온 몸이 젖은 채 힘이 없었다. 비틀비틀 일어났다. 미역같은 긴 머리는 축 늘어져 물이 뚝뚝 떨어졌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 아이들 생각이 났다. 아이들과 헤어져 여기까지 오다니.. 울컥하는 감정이 일어났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이 상태로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터벅터벅 걷다 집시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를 환영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았다. 그냥 같이 어울려 먹고 자고 입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며 원기를 회복했다. 떠날 시간이었다. 널어놓은 파랗고 긴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한참 걸어가다 남편을 만났다. 남편이 내 손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잠시 후 아이들이 뛰어왔다. 엄마를 부르며 품에 쏙 안겼다. 아이들을 다시 만나 기뻤다.


남편과 아이들을 따라가려는데 내 긴 머리가 나를 붙잡았다. 어릴 때 할머니가 내 머리를 늘 귀밑 짧은 단발로 잘라버렸다. 트라우마가 되어 나는 커서 머리를 항상 길렀다. 하지만 긴 머리가 나의 발목을 잡으니 어쩔 수 없었다. 칼로 머리를 듬성듬성 다 잘랐다. 자른 머리카락을 바다에 흘려보냈다. 짧은 머리가 어색하지만 편했다. 더이상 나를 붙잡는 것은 없었다. 가족을 따라 어떤 집 안에 들어갔다. 작지만 따뜻하고 아늑한 나무 집이었다.


밤이 되어 가족들이 잠들었다. 창문으로 달빛이 환히 내렸다. 누워 눈만 감고 있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곤히 자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달빛을 받으며 창문 아래 고요히 앉았다.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많은 것을 버렸지만 가장 소중한 것과 함께 있었다.




모래를 가지고 놀았다. 써도 써도 남을 모래가 있었다. 고운 촉감의 모래였다. 빛을 받아 반짝였다. 손에 쥐었다가 놓았다. 손에 쥐었다가 놓았다. 또다시. 손에 꼬옥 쥐었다가 놓았다. 모래는 내 손바닥 모양으로 꽉 찼다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모래로 두꺼비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움켜쥐고 놓으며 가득가득 쌓아 산을 만들었다. 탁탁 두들겨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래 가운데 구멍을 팠다. 살금살금 손가락으로 모래를 조심스레 드러냈다. 구멍이 점점 켜졌다. 위에 쌓은 모래가 조금씩 무너졌지만 끄떡없었다. 반복해서 파다 결국 구멍이 뚫렸다. 굉장한 성취감이었다. 조심히 모래를 더 드러내어 구멍을 크게 만들었다.


신나게 노니 사람들이 다가왔다. 함께 두꺼비집을 만드는 사람들이 생겼다. 점점 사람들과 두꺼비집이 많아졌다. 두꺼비집들을 연결해 물이 흐르는 길을 만들었다. 물줄기가 생기고, 흐름이 되었다.


열중해서 만들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작업이 되었다. 그냥 모래산에 조심히 구멍을 뚫는 긴장감과 성취감이 좋았다. 느낌을 따라 계속 반복했는데 여기까지 왔다. 놀랍고 부담스러웠다. 이왕이면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성공은 그저 성취감의 연속이자 호기심의 완성이라는 알아차림이 있었다. 물질은 자꾸 잡았다 놓아야 한다는 것도.


한참을 놀다 이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왔으니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탁탁 손을 털고 일어났다. “잘 놀았다, 이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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