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지언 Oct 27. 2022

이게 답이구나

10/23 명상 일기

바닥의 모래를 손바닥에 들었다. 바람이 불며 모래가 날아갔다. 모래가 빠져나가며 내 손도 같이 허물어졌다. 손가락이 사라지더니 손이 사라졌다. 팔 얼굴 몸 다리 차례차례 모두 사라졌다. 눈을 뜨니 하얀 공간이었다. 뚜벅뚜벅 걸어갔다. 공간의 끝에 하얀 문이 있었다. 금색 문손잡이를 돌려 열고 나갔다.


가슴높이의 진한 초록빛 풀을 마구 헤치며 걸었다. 뭔갈 찾는 듯했다. 숨도 쉬지 않고 하나만 생각했다. ‘내가 찾는 것.’ 하염없이 팔로 가르며 달리듯 걷다 무언가를 손으로 탁 잡았다. 내 키 높이의 장대 빨간 깃발이었다. 그걸 빼서 내 발아래 온 힘을 다해 힘껏 꼽았다. 깃발이 쿵 땅에 꼽히며 온 땅이 진동했다. 빨간색이 불꽃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가만히 바라보다 깃발을 쑥 하고 뽑았다. 깃발을 팔로 들어 하늘을 향했다. 있는 힘껏 깃발을 하늘로 던져 쏘았다. 깃발이 높은 하늘로 날아가더니 펑하고 불꽃이 되어 터졌다.


불꽃이 비가 되어 땅에 내리기 시작했다. 손에 타닥타닥 빗방울이 느껴지더니 점점 빗줄기가 굵어졌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쁜 마음에 입을 벌려 빗물을 마셨다. 발아래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땅이 보였다. 갈라진 틈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흙이 부드럽고 촉촉해졌다. 흙냄새가 피어나더니 금세 새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새싹에서 떡잎이 나고 풀이되어 자랐다. 이내 꽃이 피었다. 깃발을 뽑은 자리에는 큰 나무가 자라났다. 땅에 크고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만큼 가지가 뻗고 잎이 났다. 곤충이 생기고 나비가 날아들었다. 동물들이 보였다. 아름다운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끝없이 가다가다 멈추어 섰다. 허공에 손을 뻗어 잡아 돌려 당겼다. 문이 열리고 또 다른 나를 만났다.


나와 내가 손을 맞댔다. 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빙글 돌고 손으로 날갯짓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아름다운 움직임이었다. 춤을 추니 내 옆에 또 다른 내가 생겨났다. 둘 넷 여덟 점점 내가 많아져 온 세상을 채웠다. 마지막에 쿵 하고 땅을 치니 많은 내가 다 사라졌다. 혼자 남은 나는 다시 모래를 잡았다. 모래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내 몸이 모래와 함께 허물어 세상에서 사라졌다.


마스터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얼굴에 빛이 쏟아졌다. 따뜻했다. 밝은 빛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내 몸이 내려다보였다. 나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의 죽음은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아무런 미련도 고통도 없었다. 준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워있는 내 몸에서 하얗고 불투명한 것이 일어났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물에 비치는 빛처럼 반짝이며 허공에 사라졌다.


나는 사라지고 자각만 있었다. 지구가 보였다. 점점 멀어지더니 우주였다. 우주의 깊은 통로로 쑥 빠져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족과 함께였다. 둘째 아이가 내 코에 자기 코를 부딪히며 “코-파이브”라고 말했다. 장난 어린 미소에 웃음이 났다. 아이와 나는 코를 맞대고 서로를 간지럽히며 깔깔 소리를 냈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나는 불현듯 중얼거렸다. “이게 답이구나.”

이전 05화 잘 놀았다, 이제 가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