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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언 Feb 18. 2020

한때는 나도 잘 나갔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아이들을 겨우 재웠다. 다른 날보다 일찍 잠들었다(아싸). 재우다가 나도 잠들 뻔했다. 한 세 번 정도 고비가 있었다. 하지만 눈을 부릅떠 겨우 버텼다. 방문을 닫고 나오는데 휴~ 한숨이 나왔다. 오늘도 이렇게 버텼구나. 부엌으로 갔다. 짜파게티 봉지를 주섬주섬 뜯고, 물을 끓였다. 면과 건더기를 끓는 물에 넣어 뒤적이는데 앙~~~~~!!! 소리가 난다. 남편이 만들어 놓겠다는 사인을 보낸다. 고맙다. 방으로 들어가 둘째를 다시 재웠다. 오늘따라 다시 재우는데 오래 걸린다. 짜파게티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탓일까. 내 심장박동을 둘째가 느끼는 것 같다. 겨우 재우고 나왔더니 짜파게티가 한껏 불어있다.


젓가락을 들어 짜파게티를 먹는다. 허무함 때문인지 순간 불은 짜파게티가 나 자신 같다. 볼품없는 비주얼. 다시 돌아가지 않는 면발. 옛날과 너무 다른 나.

나에게도 잘 나가던 과거가 있었다. 회사가 맞지 않아 나는 프리랜서로 일했었다. 수입이 더 필요해서 주말에 하던 도우미 일. 도우미를 하다가 모델이 되었다. 인기가 많아지면서 몇 업체의 전속으로 활동했다. 눈 앞에서 정신없이 터지던 카메라 플래시들.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프로였던 나. 모델 활동을 하다가 가수로 데뷔했다. 참으로 화려한 삶이었다. 가수를 그만두고는 내 사업을 시작했다. 속옷과 수영복을 팔았다. 나는 승승장구했다. 사무실도 내고 직원도 뽑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매출 10억을 달성했다. 이무렵 나는 이 남자다 싶은 사람과 결혼했다. 우리는 정말 뜨겁게 사랑했다. 결혼 후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좋은 학교에 입학했다. 공부가 재미있었다. 나는 똑똑했고 예뻤고 능력 있었다.




지금의 나와 예전의 나

 


하지만 나는 지금 어떤가. 불은 면발처럼 볼품 없어진 나. 10킬로 찐 살. 늙어버린 얼굴. 관리할 수 없어 짧게 자른 머리. 초췌한 맨 얼굴. 밥풀이 붙어있는 레깅스와 노란 카레 얼룩의 티. 블랙이나 그레이 등 항상 어두운 색깔의 옷. 출산 후 냉증이 걸려 겨울이고 여름이고 신는 수면 양말. 아기 손톱 가위로 아무렇게나 자른 손톱. 언제 생겼는지 모르는 두 턱. 아침에 앞머리만 후다닥 감은 떡진 머리. 좀 더 깊게 들어가자면, 아무도 안 보니 잘 사지도 않는 넝마 대기가 된 속옷까지. 나는 구질구질한 아줌마가 되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첫째 백일 때쯤 먼저 허리가 나가고 그다음 손목이 나갔다. 머리만 감아도 감기가 걸려서 일주일에 한 번 머리를 감았다. 돌이 지나고 무릎이 나갔다. 10년을 유지하던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마의 18개월 즈음 폭식이 생겼다. 두 돌엔 새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조금 나아질 때쯤 둘째가 생겼다. 둘째를 낳고서는 하루 4시간 이상 자는 날이 드물었다. 둘째 돌에 내 생에 최고 몸무게를 찍었다. 너무 힘들어 얼굴이 폭삭 삭았다. 야식이 낙이자 습관이 됐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인데. 그 둘은 너무 다르구나. 가끔 나는 상상을 한다. 옛날로 돌아가면 어떨까 하고. 내 삶을 통제할 수 있고 마음껏 꿈을 펼치던 그 시절로. 기억을 더듬어본다. 웃고있는 나. 일과 삶을 즐기는 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나. 그런데 나는 밤마다 기도를 하고 있다. “행복해지게 해 주세요.”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의 겉은 화려해도 마음 속은 항상 외로웠다. 마치 뭔갈 증명하려는 듯 계속 몰두하고 성취해냈다. 풍요 속 빈곤, 정서적 흙수저였다. 그래서 열 번을 다시 생각해도 대답은 No.

지금 내 옆엔 나에게 치대는 엄마 껌딱지 아이 둘이 있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행복하게 해 달라는 기도도 멈추었다. 너무 힘들다. 그런데 그만큼 너무 행복하다. 미쳤다고 해도 좋다. 육아가 버겁고 내가 후져도 내 정서만큼은 채워졌다. 어쩌면 나는 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아이를 둘이나 낳고 원래의 내가 되기를 포기해 버렸는지도, 타협해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사람들이 바래서가 아닌, 내가 원해서. 남들이 뜯어말려도, 내가 좋아서. 내가 내 무덤 팠으니 누굴 탓하리.

그래서 나는 오늘도 버틴다. 가끔은 도망가고 싶다. 이성을 잃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 모습이 사랑스럽다. 지금은 내 인생 최고의 황금기다. 이제 곧 둘째 두 돌. 가장 힘든 시기가 지났으니 앞으론 내 건강을 위해 조금 더 애쓰려 한다. 화려한 겉모습으로 치장하지 않는 본연의 내가 되려 한다. 그리고 남편에겐 좀 더 신경 써야겠다. 나보다 남편이 더 어이없을 것 같다. 하지만 문제없다. 우리는 예전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모기 한 마리 들어오면 힘을 합쳐 1초 안에 때려잡는다. 우리 부부는 전우애로 거듭났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릇을 비웠다. 짜파게티는 맛이 있었다. 면이 좀 불긴 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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