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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블루밍 Sep 23. 2021

효과 좋은 고독레인지

따뜻하게 데워드립니다


언젠가 우리 집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지던 밤이 있었다. 부모님은 시골에 가셨고 동생들도 없었다. 나 혼자 자야 하는 날이었다. 평소에 우리 집은 누군가가 혼자 자는 일이 드문 편이다. 엄마가 '잠은 자기 집에서!'를 강조하시는 덕분(?)이기도 하다. 저녁시간까지는 집에 혼자 있는 게 참 좋았다. 항상 여럿이 있던 집에서 나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으니까. 자유로운 복장에 아무런 제약 없이 내가 원하는 분위기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숨소리만 들리는 고요함을 맛보았다가, 재미있는 영상을 보며 웃음소리로 공간을 채우기도 하고, 창문 너머 초록빛과 파란빛을 오랜 시간 눈에 담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자유로운 낮의 시간이 지나갔다.


깜깜한 밤이 되었다. 적어도 두 명 이상이 항상 같이 있던 집에서 막상 혼자 자려고 하면 신경 쓰이는 게 은근히 많다. 일단 현관문을 이중으로 잠근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도어록도 불안하다. (왜 영화 보면 무슨 물질 같은 걸 뿌려서 지문이 남아있는 번호를 추리해내기도 하지 않나.) 수동 잠금장치까지 철저하게 확인한다. 거실, 부엌, 안방, 내 방, 동생 방 창문도 모두 잠근다. 그래야 좀 안심이 된다. 잘 보지도 않는 공포영화나 괴담의 장면이 무심코 떠오르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괜히 심장이 더 쿵쾅거리는 것 같고, 빨리 다른 생각으로 전환하기 위해 애쓴다. 애꿎은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가 어찌어찌 잠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밤의 모습은 아니었다.


이렇게 긴장되는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가족들이 하나둘 씩 현관에 입장하기 시작하면 평소보다 따뜻함이 배가 된다. 괜스레 허전했던 마음의 온도가 제자리를 찾는다. 신나서 빨리 뛰는 심장 덕분인지 더 후끈한 것도 같다.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내 모습에 낯설어하기다. 이틀간의 고독이 내게 선사한 건, '나'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낮과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밤이었다. 애초에 내가 나답게 존재해야 건강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고, 따뜻한 관계가 유지되어야 생기 있는 내가 될 수 있다. 고독한 낮과 밤을 통해 둘 다 가능한 날이었다.


고독이 다녀간 자리는 매끈하고 따뜻하다.


마치 맥반석 달걀처럼 말이다. 자유를 만끽하며 스스로를 최선을 다해 돌보았기에 모난 부분 없이 매끈하고, 자신에 대한 사랑과 관계의 소중함을 느낀 덕분에 따뜻하게 데워져 있다. 방금 전 다른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서 한참을 떠나지 않는 온기처럼 고독도 그렇게 우리 곁을 다녀간다. 따뜻함을 남기고 간다. 그러니 그 자리는 어느 누가 와도, 어떤 대상이 들어와도 상관없다. 고독의 진면목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진정한 '나'를 내보이며 인간관계도 잘 맺을 수 있게 .


이제는 밤에 혼자 있을 일이 없다. 올해로 4살이 된 사랑하는 반려견이 생겼기 때문이다. 까만 중형 믹스견인데, 10kg을 조금 넘어 듬직하다. 꽉 안을 때면 사람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강아지의 체온은 사람보다 높다.) 어쩌다 반려견과 둘이 남는 날이면 지난날의 고독한 밤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보낸다. 더불어 고독과 점점 친해지는 중이기에 혼자 있는 밤이 더 이상은 두렵지 않다. 오히려 고독해서 따뜻한 밤을 보낸 적도 많다. 이 글을 읽기 전이라면 따뜻한 고독이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고독레인지의 효능이 잘 전달되었길 바라는 마음이다.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 속에 헤아려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 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 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 시인 이해인 , <고독을 위한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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