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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블루밍 Sep 16. 2021

내가 편애하는 기억

청순한 뇌가 고독에 미치는 영향


영화를 보고 나면 내용을 금방 까먹는다. 분명 몰입해서 재미있게 봤는데 두세 달만 지나면 그 기억이 홀라당 날아간다. 한날한시에 같이 본 걸 벌써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신기해하던 남자친구도, 이제는 이거 혹시 기억나냐고, 크게 기대하지 않는 듯한 캐주얼한 물음을 던진다. 이렇게 청순한 뇌를 가지고 있으면 적어도 두 번째까지는 작품을 거의 처음 보는 것처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기준이 매번 같진 않지만 나는 인상 깊은 순간을 제외하고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사실 대단히 좋았던 것 말고는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별난 일들이 생기곤 하는데, 기억력이 좋아봤자 골치만 더 아픈 것 같다. 그래서 최대한 강렬하게 행복한 기억들만 간직하려고 한다. 무의식마저 나를 따뜻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좋은 기억을 편애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기억을 편애하는 건 비교적 차별에서 자유로운 행동이니 말이다.


하루는 널찍한 카페에서 혼자 네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야 다. 그날은 유난히 삼삼오오 즐겁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카페에 많았다. 음료를 들고 홀로 자리에 앉았는데, 혼자인 게 아쉬웠다.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그 마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나는 카페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러 왔기에, 그 감정은 금방 잊고 내가 생각한 것들을 시작한다. 에어팟을 귀에 꽂고 휴대폰을 타닥 만진다. 블루투스를 켜고 에어팟을 연결한 후 노래를 튼다. 음량을 1로 잔잔하게 맞춘다. 어느새 주변에 보이지 않는 막이 생기고, 나만의 1평짜리 공간이 만들어진다. 내가 선택한 고독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고독에 몰입하는 과정 중에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일 수 있다. 혼자 카페를 가거나 밥집을 가는 게 흔한 일이 된 지 오래라고는 하지, 이따금씩 그런 시선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저 사람은 여기 혼자 와서 뭐 하는 걸까.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무언가에 집중이 될까. 사실 내가 대학생일 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당시 나는 주변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정작 스스로탐구할만한 기회를 갖고 알아갔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생각만 궁금해하는, 아직 덜 큰 성인이었다. 그러다보니고있는 카페에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등 무언가를 혼자서 할 생각은 꿈도 못 꿨다.    


이랬던 내가 이제는 당당하게 고독을 이야기하고 권한다. 서른을 목전에 두고 많은 생각이 들긴 했나 보다. (아직 논하기 이를지도 모르겠으나, 어느 누가 세월을 이길 수 있으랴.) 혹여나 홀로 어떤 공간에 갔는데 고독의 시작을 방해하는 시선이 있다면, 그 시선은 빠르게 잊을수록 좋다. 그럼에도 계속 떠오른다면 '고독 준비 운동'을 하면 된다. 긴장이 풀린 채로 편히 있다가 갑작스레 무리한 운동을 하려고 하면 몸이 찌뿌둥한 건 당연하다. 근육이 놀라지 않도록 준비 운동을 하는 것처럼 고독도 마찬가지다.


헛둘헛둘.

혼자인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헛둘헛둘.

혼자이기에 나를 만나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헛둘헛둘.

혼자라서 가능한 자유를 만끽해보자.


이렇게 마음으로 하는 준비 운동을 끝내면 고독에 집중하기 쉬워진다. 고독 준비체조를 하는 스스로를 살짝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어느새 달콤한 고독에 푹 잠겨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군중 속의 고독은 은근한 쾌감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시간을 보내면 고, 나는 내가 목표로 삼은 '선택적 고독'에 맘껏 취하면 그만이다. 어쩔 수 없는 고독이 아닌, 본인이 선택한 고독임을 기억하자. 그 순간 누가 더 행복한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애초에 그 공간에 있는 이유가 서로 다르기에 비교가 불가하다. 또한 행복의 정도를 비교하는 순간, 행복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테니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고독하다면, 그것은 당신의 정신이 자유로운 상태라는 걸 의미한다. 그냥 잠자코 가만히 있는 것, 나를 홀로 내버려 두고 외로움의 바닥까지 내려가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치유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몸은 단백질이 만드는 근육과 더불어 고독이 만들어주는 정신의 힘이 필요하다.

- 원재훈, <고독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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