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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 최 사카모토 Oct 27. 2024

당신을 스친 어떤 여자(4)

2024년 9월 12일 새벽. 여자가 전일 다섯 번째로 남자를 목격하고 신고함으로써, 나흘 뒤인 추석 연휴에 예정되어 있던 피해자 조사가 당일 오전 열 시로 앞당겨졌다. 원룸 한가운데 자리한 슈퍼싱글 침대에 덩그마니 누워있던 여자는 일찌감치 잠들기를 포기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여자의 몸은 잠들기를 거부하는 듯했다. 정신적으로 소진되어 있는 와중에 해야 할 일이 많아 긴장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날은 여자가 가장 가고 싶은 학과가 있는 D대학의 수시 원서 접수 마감이 있는 날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육 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여자는 공부를 하러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이전에 대학에 뜻이 없었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별다른 특이사항 없이 대한민국 의무 교육 과정을 차근차근 밟은 여자는 남들과 같은 나이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2학년 때까지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던 여자는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기도 했으나, 어느 순간 툭 부러지듯 정신과 몸이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처음으로 문제가 드러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갑작스레 한 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병원에 방문한 여자는 추간판 탈출증 진단을 받았다. 그 일이 신호탄이 된 듯 몸은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밥 먹듯 위염과 위경련과 부정출혈에 시달렸다. 시험에 대한 부담감으로 과호흡을 일으켜 쓰러지기도 했다. 자율 신경 실조증, 미주신경성 실신 등 여태 듣도 보도 못했던 각양각색의 신체화 증상이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확장하며 여자의 몸 구석구석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그와 더불어 심각한 우울증을 앓게 된 여자는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마지막으로 학교 시험을 치지 않게 되었다.

기존 성적을 가지고도 어떤 대학엔가 진학할 수 있었겠지마는 그러한 선택지는 당시 여자의 시야에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에게는 스스로 설정한 일정 수준 이상의 기대치가 있었다. 자신이 끝까지 버티지 못한 탓에, 여태 수명을 깎아가며 등가교환식으로 쌓아 올린 내신 성적과 주변의 기대 등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는 사실이 여자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럼에도 퇴학 당하지 않을 만큼의 출석 일수를 겨우 채운 여자는 어찌어찌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이후에는 현실적인 진학 상담을 받거나 건설적인 미래를 계획하기는커녕 먹고살기 급급한 날들이 이어졌다. 졸업 이후 여자의 최우선 순위 목표는 경제적 자립이었다. 성치 않은 몸과 정신으로 무작정 사회에 뛰어든 지 육 년이 지나자, 쥐어 짜내면 몇 방울 떨어질 정도의 여력이 여자에게 생겼다. 꼭꼭 숨어있던 대학 진학에 대한 미련이 살금살금 피어오른 것은 그때였다.

여자는 오랜 날의 한을 풀어보고자 다짐했다. 약 한 달 전, 졸업식 이후 처음으로 모교에 방문한 여자는 고등학교 재학 당시 성적과 교내 수상 내역, 담임선생님의 평가 등이 기록되어 있는 학교생활기록부를 출력했다. 그리고 합격 가능성이 비교적 높은 대학의 입시 전형을 꼼꼼하게 알아보았다.


D대학 수시 입학 전형 중에는 “학교장 추천 전형”이라는 게 있었다. 말 그대로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고등학교의 학교장 추천을 받는 전형으로, 여기에는 여덟 명의 인원 제한이 있다. 여자의 학생부 성적을 매우 유리하게 반영하는 해당 전형으로 원서 접수할 경우, 여자의 D대학 합격 가능성은 매우 높게 점쳐졌다. 여자는 모교에 방문해 자신을 추천해 주길 요청했다. 그러나 학교 측에서는 졸업생인 여자보다는 현재 재학 중인 학생들이 우선적으로 추천 자격을 얻는다고 답했다. D대학은 서울권 내 위치한 나름 인기 있는 학교이기에 여덟 명의 머릿수는 재학생으로 모두 채워졌다.

그렇다면 여자에게는 추천받을 기회가 아예 없는가? 그렇지는 않았다. 추천 인원 여덟 명 중 D대학 지원을 포기하는 사람이 생기면, 비로소 여자에게도 기회가 온다. 여자는 누군가 포기 의사를 밝혀 추천 자리가 났다는 바로 그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D대학 원서 접수 마감시간은 당일 오후 네 시였다. 피해자 조사는 오전 열 시부터이고, 늦어도 오후 한 시 전엔 끝날 것이다. 그때까지 연락을 기다렸다가 피시방에 들러 원서 접수를 마무리해도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여자는 최근 겪은 일련의 스토킹 사건으로 심신이 몹시 고단했다. 여자는 돈 버는 일 외의 일정을 모조리 취소했고, 집 밖에 나가는 걸 두려워하게 되었다. 스토킹은 여자에게 귀책사유가 없는, 돌연 난입한 불청객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이 명백했지만, 실상 여자는 가까스로 쌓아 올린 일상을 제 손으로 파괴하고 있었다.

한계에 치닫도록 스스로 채찍질해가며 애써 만든 무언가를 외력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박살 내는 상황. 그때 느껴지는, 자신은 아무것도, 정말로 어떠한 일도 혼자 해낼 수 없다는 극도의 좌절감과 무력감을 여자는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오늘 피해자 조사를 끝내고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삶을 중단하고 싶은 충동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앞날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머릿속을 먹구름처럼 뿌옇게 메웠다. 이쯤 되면 여자는 조력자살이 허용되는 국가라든지 수면제를 한꺼번에 몇 알 먹으면 죽을 수 있는지 따위를 알아보는 익숙한 절차를 밟았다. 역시 모든 일의 해결 방법은 자살뿐이라는 결론에 가까워지고, 모아둔 수면제를 머리맡에 줄지어 두고 흐느끼던 그때, 여자의 뇌는 생존을 위해 경조증 상태에 돌입했다.


여자는 캄캄한 새벽 서슬 퍼렇게 눈 뜬 채, 피해자 조사가 끝나면 어떻게 죽여주는 하루를 보낼지를 생생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일단 차를 빌려야겠다. 오랜만에 운전을 좀 해야겠어. 운전을 하는 행위는 여자에게 혼자 힘으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유용성을 스스로 부여함과 동시에 해방감을 줬다. 렌터카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가야지. 어디가 좋을까? 오늘의 바다는 반드시 최고로 예뻐야만 해. 그래, 그때 그 바다…. 신두리 해안이었나? 거기가 참 예뻤는데. 그때 묵었던 오션뷰 펜션은 위치도 경치도 퍽 좋았어. 금액을 추가하면 야외 바비큐를 할 수 있었지, 맞아. 그리고……. 여자는 다음 상상을 이어가다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곧바로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푸르르 털어냈다.


방금 내가 고기를 구워 먹고 싶다고 생각한 건가?


여자는 자신이 금기시해왔던 행위를 욕망했다는 사실에 몸서리쳤다. 완전 채식을 실천한지 어언 오 년, 여자는 그간 고기를 구워 먹는 상상은커녕 입에 대고 싶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비윤리적인 공장식 축산 방식에 의해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 착취당하는 비인간 동물의 비릿한 사체 따위를 먹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여자는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머릿속에서 내보내기 위해 애썼다. 운전하는 것과 바다를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죽여주는 하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걸로 부족하다면, 어쩌면, 누군가와 함께 밤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완벽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여자는 새벽 여섯 시에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장 피시방에 가서 걸리적거리는 원서 접수부터 모조리 끝내버릴 요량이었다. 혹여 오후 네 시가 되기 전에 D대학 학교장 추천 전형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닥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이를 기다리고 있을 인내심이 여자에게는 없었다. 지금, 당장, 최대한 빨리. 원서 접수를 해치우고 피해자 조사가 끝나자마자 펑펑 놀지 않는다면 여자는 참지 못하고 마침내 스스로 죽여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흥분 상태가 오래 지속되어 성정이 조악 해진 여자는 부리부리한 눈알을 핑그르르 굴리며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 서랍을 뒤져 후추 스프레이를 꺼내 들었다. 전 애인으로부터 몇 년 전에 받은 물건이었지만 싱크대에 테스트해 본 결과 아직 성능은 건재했다.


여자의 집에서 피시방에 가기 위해서는 남자가 여자를 기다리며 늘 대기하고 있던 고가도로 방향을 지나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새벽 여섯 시. 놈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거니와 새벽엔 잠을 잘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마주쳤던 건 주로 밤이었으니, 지금 시간대가 오히려 안전할지도 모른다. 또, 어제 경찰로부터 나름의 경고 조치가 있었을 테니 놈도 다소간 몸을 사릴 것이다. 그런 식으로 여자는 지금 당장 밖에 나가고 말겠다는 주장 뒤에 그 일이 그다지 위험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를 하나 둘 덧붙였다. 그러다가도 막상 남자를 마주쳤던 아파트 입구를 지나는 상상을 하자마자 뒤통수에 소름이 돋고 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씨발, 내가 왜 숨어 있어야 해?


여자는 벌컥 소리 없는 화를 내며 현관문을 박차고 성큼성큼 나갔다.


어두컴컴한 하늘은 곧 비를 쏟아 낼 듯이 잿빛 구름으로 가득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온 여자는 아파트 공동 현관을 나서면서 손에 쥐고 있던 후추 스프레이의 뚜껑을 열었다. 이를 주머니에 넣거나 긴팔 소매 안쪽으로 숨기지도 않았다. 여자는 눈을 세로로 치켜뜬 채 고개를 휙 휙 돌려가며 주변을 노려보듯 살폈다. 그리고 저벅저벅 고가도로 쪽으로 향했다. 새벽녘의 한기를 머금은 안개가 엷게 내려앉아있었고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여자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빠른 걸음 속도에 맞춰 덩달아 심박수가 올랐다. 몇 걸음만 더 가면 남자가 어제 여자를 기다리며 앉아있던 바로 그 장소가 나온다.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목구멍 너머 머리통까지 울리는 바람에 여자는 머리가 깨질 듯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오른손에 스프레이를 꽉 움켜쥔 채 여자는 의자 뒤편의 기둥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기둥 앞쪽을 스윽 들여다봤다.


아무도 없다.


여자의 긴장과 두통이 아주 약간 누그러들었다. 여자는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고가를 건넜다. 맞은편에서 중년 남성이 걸어왔다. 여자는 눈알에 새빨간 핏대를 세우고 스프레이 쥔 손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겉면에 분홍색 칠이 되어있고 거의 립스틱만 한 사이즈인 스프레이는, 손에 쥐고 있다 한들 그게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기 쉽지 않았으며 보는 사람에게 얼마큼의 위협을 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마치 자신의 손에 칼이나 총을 쥔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지금 아주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놈을 해칠 수 있다, 그놈뿐 아니라 다른 누구든 나를 위협하는 자를 역으로 공격해 죽일 만한 힘을 나는 갖고 있다,따위의 믿음만이 여자에게 방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

중년 남성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만일 저 자가 내게 다가와 허튼짓을 하려거든 손에 든 스프레이를 그 얼굴에 사정없이 분사하리라. 시야가 차단되고 숨이 막혀 캑캑대는 그를 거친 발길질로 벌러덩 넘어뜨려 뒤통수를 깨뜨리고, 온몸 구석구석 처참하게 짓밟아주리라. 얼굴을 막고 있는 양 팔을 무릎으로 찍어누른 채, 자비 없이 주먹을 내리꽂으리라. 이빨이 털려 나가고, 광대뼈가 함몰되고,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그러다가 아드레날린 분비가 잦아들어 주먹질하던 손의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쯤에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나, 만신창이가 된 놈의 무방비하게 벌어진 가랑이를 반드시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짓이기리라. 컥, 크윽, 탈려듀테여,라며 우스꽝스럽게 발음이 새는 어떤 남성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여자는 비죽비죽 웃음을 흘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도 여자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몇 명의 남성과 여성이 여자를 스쳐 지났을 뿐이다. 여섯 시 반 무렵 무탈히 피시방에 도착한 여자는 한 시간 반 이용권을 결제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고갈 직전인 인내력과 집중력을 필사적으로 쥐어짜 원서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딸깍. 딸깍. 사람이 없는 새벽 피시방에서 여자의 마우스 클릭음만 간간이 울렸다. 여자는 D대학에 학교장 추천 전형이 아닌 면접이 포함된 학생부 종합 전형으로 원서를 접수했다. 해당 전형은 여자가 말아먹은 고등학교 3학년 성적까지 모두 반영하기에 합격 가능성이 낮다는 걸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지원 가능한 최대 개수의 원서를 모두 접수하고, 사십만 원에 달하는 원서료 결제까지 마치는 순간, 여자는 마침내 참았던 숨을 파아- 하고 내쉬었다.


이제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여자는 한 달째 손대지 않았던 에쎄 체인지를 들고 흡연실로 갔다. 주황색 인조 가죽으로 덮인 푹신한 소파에 앉은 여자는 담배를 입술에 물고 끝부분을 앞니로 잘근잘근 씹어 캡슐을 깨뜨렸다. 틱. 틱. 일회용 가스라이터의 부싯돌을 두어 번 당기자 주홍색 불꽃이 피었다. 여자는 입에 문 담배의 반대편 끝자락을 불꽃에 담근 채 숨을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스으으읍, 후우우우……. 아- 역시 존나 맛없네,라고 생각하며, 여자는 씁쓸해진 입속에서 혓바닥을 굴리다 재떨이에 침을 뱉었다. 술에 만취했을 때를 제외하면 단 한순간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연초 따위 더럽게 맛없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런데 왠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담배를 꼭 피워야만 할 것 같았다. 여자는 담배 피우는 행위가 상실과 충만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들숨에 산소를 비롯한 니코틴과 타르 등 각종 유해 물질이 여자의 폐로 빨려 들어갔다가, 날숨에 여자의 가슴 안쪽 깊숙이서 빠져나온 무엇이 희뿌연 연기가 되어 흡연실 부스 안에 뭉게구름처럼 번졌다. 연기 입자는 공기 중으로 빠르게 확산했다. 몇 초 뒤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여자의 주변은 다시 무색투명해졌다.


일곱 시경 여자는 피시방을 나왔다. 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여자는 회색 집업에 붙은 후드를 덮어쓴 채 맞은편 베이커리로 뛰어들어갔다. 딸랑-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고소한 버터 냄새가 후욱 불어왔다. 갓 구운 크루아상, 뺑 오 쇼콜라가 식힘망에 올려진 채 진열되어 있었다. 꼴깍.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지만 여자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버터와 우유 등 젖소를 착취해 생산되는 유제품도 먹지 않는 비건이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고개를 돌린 자리에 “노 버터, 노 에그, 노 밀크” 비건 쿠키가 있었다. 종류도 여러 개였다. 신중한 고민 끝에 여자는 말차 마카다미아 쿠키를 집어 계산대에 가져갔다.


“그건 판매용이 아니고 진열용이에요. 제품 이름 알려주시면 꺼내드릴게요.”


계산을 마친 여자는 냉동고에서 꺼내진 차가운 쿠키를 건네받았다. 여자는 자리에 앉아 곧바로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으그득. 단단하게 얼어있는 쿠키 겉면으로 앞니가 헛발질하며 미끄러졌다. 여자는 손바닥을 비벼 마찰열을 일으킨 뒤 그 사이에 쿠키를 잠깐 끼웠다 뺐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앞니로 쿠키 부수기를 시도했다. 쿠키는 첫 번째 시도 때와 별다를 바 없는 강도를 자랑했으나, 앞니를 단단히 세운 여자가 수직 방향으로 있는 힘껏 치악력을 발휘하자 까득, 소리를 내며 마침내 쿠키가 쪼개졌다. 여자는 박살 난 쿠키 조각을 입안에 머금고 어금니로 꼭꼭 씹었다. 다그닥 다그닥 소리를 내며 쿠키는 더 작은 조각으로 부서졌다. 코코넛오일의 강한 향이 말차의 맛을 방해했고, 마카다미아가 없는 쿠키지 부분은 설탕과 밀가루만 들어간 단순한 맛이었으며, 온도는 차가웠고, 식감은 단단했고,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맛이 없다.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화를 소비한 대가가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는 사실에 여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시 한번 낯선 욕망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들어간 재료가 눈에 보이는 뻔하고 깔끔하고 단순한 맛이 아닌, 비릿하고 복잡하며 예측 불가능한 맛을 원한다. 잘게 조각난 음식이 혀끝에 닿는 순간 동물의 피 맛을 감지한 미뢰가 이를 뇌에 전달함으로써 죄책감을 동반한 상실과 충만의 복합적인 감각을 느끼고 싶다.

여자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목구멍 아래쪽으로 애써 미뤄 넣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처음으로 제게 말을 걸었던 건 2022년 11월 27일이었어요. 그날 찍은 사진이 핸드폰 앨범에 남아있었거든요. 여자는 진술하는 내내 명치께를 움켜쥐었다. 여자의 위는 주기적으로 쥐어짜는 통증을 보내왔고 그때마다 여자는 윽 하고 작게 신음하며 움찔 몸을 말았다. 어디 안 좋으세요? 힘들면 쉬었다 해도 돼요. 아뇨, 괜찮아요. 빨리 끝내고 싶어서요. 열 시에 시작된 조사는 쉬지 않고 이어졌다. 어느덧 열한 시 삼십분이 되었다. 무음 설정해둔 여자의 핸드폰 화면에 불이 켜지며 카톡 메시지 알림이 띄워졌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여자의 눈알이 재빠르게 글자를 따라 굴러내려갔다.

D대 추천 자리 났어. 생각 있으면 바로 연락 줘.



여자는 그제야 제 손으로 무엇을 파괴했는지 실감했다.

“죄송한데… 잠깐 쉬었다 해도 될까요?”


조사를 마치고 경찰서를 나온 여자는 바로 앞에 있는 한식집에 갔다. 거기서 날계란이 올라간 돌솥비빔밥과 황태 콩나물국을 먹었다. 노른자를 터뜨려 힘차게 섞은 비빔밥에서 날계란 특유의 비린내가 났다. 그러나 뜨거운 돌솥에 지져진 계란이 차츰 익어가며 비릿함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여자는 꾸역꾸역 음식을 입안에 넣고 씹고 삼키다 끄읍 끄억 흐어억 소리를 내며 울었다. 육 년 전 그때도, 육 년이 지난 지금도, 여자는 무엇 하나 버텨내지 못했다. 심지어 동물성 식품을 먹는 것조차 참을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이 여자는 견딜 수 없이 미웠다.


그날 여자는 운전을 하지도 바다를 보러 가지도 않았다. 그저 식료품점에 들러 새송이버섯과 양파와 대파와, 이백 그램에 삼만 팔천 원짜리 한우 부채살을 샀을 뿐이다. 여자가 사 년 전 입주한 신축 원룸에서 처음으로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겼다. 오랜 시간 여자의 식사에서 메인 디시 자리를 차지했던 야채는 가니시로 밀려나고, 한우 부채살 스테이크가 그 자리를 꿰찼다. 여자는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 정성껏 구운 소고기를 한 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었다. 어금니에 짓이겨지는 근질의 식감, 그 아래로 배어 나오는 육즙의 냄새 등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복잡하고 낯설고 새로웠다. 그 감각을 오랫동안 곱씹으며, 여자는 소의 피에서 우유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젖은 하얀 피라고 하고, 우유는 소 젖이니까 그렇게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우유 냄새나는 육즙을 품은 소고기를 씹으며 여자는 조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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