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가로등

by 새나

사소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아려온다. 평소 같으면 그냥 웃어넘길 말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내리 꽂힌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모두가 잠든 새벽시간에 냉장고 구석에 있던 맥주 한 캔을 꺼내 나의 애쓰던 하루를 위로받고자 했다. 맥주캔 뚜껑을 따는 '치~익'하는 소리에 입안의 건조함은 더 해진다. 빨리 시원한 탄산이 담긴 맥주 한 모금을 달라고 아우성 되는 나의 건조한 입속에 시원한 청량감이 감도는 맥주 한 모금을 허락한다. 적당한 탄산과 적당한 부드러움이 있는 맥주가 소란스러운 마음에 가 닿았다. "뭐가 문제야?"하루 종일 적당한 이유를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소란스러운 이유가 무엇인지 나의 하루를 맥주 한 캔을 앞에 두고 함께 곱씹어 보았다.


딱히 이렇다 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일상이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다투는 아이들을 보고 적당히 소리를 질러 중재에 나서면서 받는 아이들의 불평은 매일 듣는 말이었다. 아침 반찬에 대한 남편의 불만과 아이들의 불만도 그냥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특별한 것이 없던 그냥 평범한 하루였는데 나의 마음은 평범한 하루가 되지 못했다.


믹스커피를 사면서 사은품으로 받은 카카오프렌즈 라이언 글라스 컵에 맥주 거품이 사라진 맥주잔을 바라보고 있자니 생기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의 모습 같아 보였다. 라이언 글라스 컵에 든 김 빠진 맥주를 단번에 마셔버렸다. 이대로 두면 싱크대 하수구에 버려질게 뻔한 맥주를 보니 지금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베란다 창문으로 보이는 새벽의 어둠 속에 이팝나무 옆에 놓여있는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이 비추고 있는 이팝나무의 만발한 흰꽃 잎들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언제 저렇게 꽃을 피운 거지?" 푸른색 잎만 무성했던 아파트 한편에 우뚝 서있던 나무에 흰색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새벽어둠 속 가로등 불빛은 이팝나무의 만개한 흰꽃들만을 비추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캄캄한 연극무대에서 조명이 커지며 주인공을 비추는 것처럼, 캄캄한 새벽의 어둠 속의 조명은 이팝나무를 비추고 있었다.


한숨에 들이켜 비어있던 카카오 라이언 글라스 잔에 시원한 맥주 8 거품 2 비율로 따라 한 손에 들고 베란다에 놓아둔 의자에 앉았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낮동안은 보지 못했던 이팝나무의 만발한 꽃들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는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이팝나무의 만발한 꽃들 만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저 이팝나무를 비추는 가로등처럼 나의 어두운 마음도 비쳐줄 가로등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루가 소란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에게 "이쪽 말고 저쪽으로 가봐"라고 불빛을 비추어주고, 답을 모르고 헤매는 나에게 힌트를 비추어주는 나만의 가로등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마치 연극무대의 주인공에 비추어지는 스포트라이트처럼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나만의 조명이 있었으면.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분리수거장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팝나무가 오늘따라 너무 아름다워 보인다. 많은 것들이 보이는 낮시간에는 그저 그런 나무로 보였던 이팝나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가로등이라는 조력자가 나타나 빛을 비추니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어둠이 없었다면, 그 어둠을 비추는 가로등이 없었다면 그저 그런 나무로 기억될 나무였을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안갯속 같은 나의 미래를 외로이 투벅투벅 걸어가는 나의 발등 위로 비추어 주는 나의 가로등은 언제쯤 나를 위해 불빛을 내어 줄까? 외로운 나에게 위로의 말도 건네고, 지친 나에게 용기의 말도 건네는 나만의 가로등 불빛이 너무 늦지 않게만 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모두 마셔 버렸다.



오늘은 끔찍해 보이는 일이 내일 일어날 멋진 일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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