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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감정의 맛 13화

미역국은 미역국이었다

:낙심하다

by 새나

시험날 아침은 늘 긴장으로 가득했다. 책을 덮어도 머릿속에서는 마지막으로 정리했던 문장들이 떠다녔고, 가방을 여닫을 때마다 중요한 필기구를 빠뜨린 것은 아닌지 확인했다.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러 가는 날도 그랬다. 다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생일과 시험날이 겹쳤다. 시험날이 나의 생일이었다.


토요일이라 다행이었다. 남편에게 아이들을 밑길 수 있었다. 아침부터 남편이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평소라면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남편이 국을 젓고 있었다. 시험날이라 나를 배려하는 것이겠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넓은 등이 유난히 듬직해 보였다. 남편 덕분에 여유롭게 준비했다. 수험표를 챙기고, 필통을 가방에 넣었다. 시험 전에 훑어볼 정리 노트도 챙겼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을 때, 식탁 위에 놓인 국을 보고 나는 잠시 멈칫했다.


미역국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시험이 끝나고 나서야 생일을 챙길 생각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뷔페집으로 가기로 했는데. 잊어버린 걸까. 뷔페는 뷔페고. 미역국은 미역국인 건가.


나는 미역국을 보며 낙심했다.


시험날 미역국을 먹으면 미끄러진다는 속설을 믿었다.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은 그러지 못했다. 긴장한 상태라서 그런지 사소한 것도 예민하게 받아들여진다. 나는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시험인데..."

내 말투에는 투정이 섞여 있었다. 남편은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웃었다.

"생일이잖아. 얼른 먹어."

"시험날 미역국 먹으면 시험에서 미끄러진다는데."

"그런 게 어딨어? 미역국 먹었다고 떨어질 리가 있나"

그렇지만 나는 이미 낙심하고 있었다. 아직 시험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결과를 받아 든 것처럼 허탈했다. 시험 당일 아침, 나는 엿이나 찹쌀떡을 기대했다. 미끄러지는 음식이 아니라, 달라붙는 음식을 먹으며 좋은 기운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걸 몰랐다. 해맑은 얼굴로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미역국을 끓였다.


아이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 성의를 봐서 한 숟가락이라도 먹기로 했다.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설마, 정말로 떨어지겠어?

떨어지면 어떡하지?

두 가지 생각이 엇갈리는 가운데 나는 미역국을 삼켰다. 미역이 목구멍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순간. 시험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신이기를 바랐다. 남편의 말대로 그런 게 어딨어 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시험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몇 달 뒤, 합격 문자를 받았다.

미역국은 그냥 미역국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시험 당일 낙심의 상징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험날 함께했던 남편과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긴장하고 있는 내 곁에서 아이들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나를 응원했다. 남편은 미역국 한 그릇으로 나의 하루를 든든하게 만들어 주려 했다.


우리는 종종 낙심한다. 시험을 앞둔 날, 예상치 못한 실수를 했을 때,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실패를 미리 걱정할 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깨닫는다. 낙심의 감정도 결국 지나간다는 것을.


나는 이제 시험 당일 아침 당당히 미역국을 먹는다. 미역국은 그냥 미역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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