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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감정의 맛 14화

취향차이

:비참하다

by 새나

결혼과 동시에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남편도 그러기를 원했다. 나 역시 직장생활에 지쳐 있었으므로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대신. 나는 집안일을 맡았다. 남편이 일을 하고, 나는 집을 돌보는 삶.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해내며 살았다.


처음에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꾸미고,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버겁긴 했지만 남편도 밖에서 힘들게 일하니까. 나도 내 몫을 감당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집안일 속에서 가끔은 숨이 막히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집안일들이 익숙해졌다. 바깥일이 힘든 것처럼 집안일도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나는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남편이 퇴근길에 베이글이 든 상자를 들고 집으로 왔다.

"요즘 다들 이거 먹더라"

상자 안에는 여러 종류의 베이글이 들어 있었다. 오리지널 베이글과 크림이 듬뿍 들어간 것, 초콜릿과 과일로 장식된 화려한 베이글도 있었다. 접시에 하나씩 올려놓으면서 모양을 살폈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고 가격도 꽤 나갈 것 같았다.

"이거 비싸겠는데?"

그냥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나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다 이렇게 먹어. 너만 저렴한 빵 찾지. 다들 안 그래. 집에만 있어서 모르는가 본데. 다들 이 정도는 쓰고 살아."

그 순간. 이상한 감정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비참했다.


나는 단순히 가격을 물었을 뿐인데. 남편의 말투는 마치 내가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처럼 말했다. '집에만 있어서 모른다니'라니.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모른다'라니. 마치 내가 유행에서 한참 뒤처진 사람처럼. 세상과 단절된 존재처럼 느껴졌다.


집안에서만 활동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남들은 유행하는 빵을 사 먹는 데 나만 저렴한 것만 찾는 사람.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일까.

그런 사람이면 뭐 어때서.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잖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는 속을 다스려야 했다.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 먹다 남은 반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물, 무생채, 남은 두부조림. 고추장을 한 숟가락 떠서 그 반찬들과 함께 비볐다. 베이글을 먹어서 그랬던 건지. 남편이 한 말 때문인지는. 속이 이글거렸다. 매콤한 무엇가가 필요했다.

숟가락으로 비빔밤을 휘휘 섞으며 생각했다.


먹다 남은 반찬

지금 내 기분과 닮아 있었다.


비참했다. 내 삶이 먹다 남은 반찬처럼 느껴졌다. 한때는 신선하고 윤기 있던 반찬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잊혀 가는 것들. 처음에는 귀하게 차려진 음식들이었지만, 결국은 냉장고 속으로 밀려나 버린 것들.


나는 비참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비빔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었다. 매운 고추장이 속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시원했다. 느글대던 속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씁쓸한 속에서 위로가 되는 맛이었다.


비싸고 예쁜 디저트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 관심 속에서 사라진다. 화려한 장식이 올려진 베이글도 결국은 흔한 빵이 된다. 한때 사람들이 열광하던 음식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져 간다.


세상은 늘 새로운 것에 열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열광도 흐릿해진다. 그리고 결국 남는 것은 단단한 본질뿐이다.


나는 유행하는 디저트를 몰라서 안 먹는 게 아니다. 그저 그것에 휘둘리지 않을 뿐이다. 내 취향이 아니니깐. 나는 저렴한 빵이 입맛에 더 맞으니깐. 집안에만 있다고 바깥세상을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서로의 일상을 존중해야 할 배려가 사라진 대화였다. 집안일이든 바깥일이든 삶을 꾸려가는 데에는 다 그만한 무게가 있는데.


나는 비참한 기분을 삼켰다.


남편은 화려한 베이글을 보며 세상의 흐름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남은 반찬을 보며 삶의 깊이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결국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니깐.


그날의 서운함은 각자 취향차이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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