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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카 Aug 19. 2022

사람의 눈은 정확하게 볼 수 없다

수채화로 시작했다가, 요즘엔 이것저것 다한다.

수채화를 따라 그리는 책이 시중에 많은데, 그 중 매일매일 따라하기 챌린지를 주는 책을 참고해서 수채화 놀이를 한다. 캐릭터라던지, 꽃이라던지 간단한 사물에 그라데이션을 넣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나면 보통 마음에 들지 않는데, 다른 사람은 예쁘다고 해주니 그걸로 만족도가 채워진다.


컬러리스트를 공부하며 조색하는 활동도 한다. 색을 눈 앞에 보이는 것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보는 것인데, 가끔은 '이런 색을 만들기 위해 생각지 못한 색을 섞는구나'를 깨닫는다. 붉은 빛이 도는줄 몰랐던 색이었는데, 붉은색을 첨가하니 그런 색이 나오는 느낌이랄까. 아직 그렇다할 깨달음을 얻은 것은 없지만 색의 변화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단계다.


추후 소개될 선긋기도 재미있는 활동 중 하나다. 매일 똑바른 선을 긋는 연습을 하는 것인데, 생각보다 재미있다.

뭘해야할지 모를 때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시작하면 선을 그리는 데 몰두하게 된다. 다음번엔 좀 더 잘 그려봐야지 하며 혼자만의 챌린지를 마이크로 단위로 만들어가는 활동이랄까. 10회정도밖에(10일) 하지 않았는데 벌써 선이 정교해지는 느낌이라서 충족감도 느낀다.


매일 4컷 만화도 그리게 되었다. 컨텐츠가 생각보다 문득 떠오르고,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연필로 쓱쓱 그려놓으면 (지우개따위는 거의 쓰지 않아야 한다.) 어느새 완성되어있는데, 언젠가는 내가 그린 것을 보고 큰소리로 웃었던 적이 있다. 그림 속의 나에게 동질감을 느꼈을 때다. 나를 위로하는 방법으로 4컷만화를 활용하는 듯 하다.


가끔은 미술 수업에서 진행하는 '보고 똑같이 따라그리기'를 시도해본다.

이럴 때는 정교하게 데생을 하는데 치중하는 편이다.

특히 아주 실오라기 같은 빛의 개입을 유심히 본다. 열심히 할 때에는 '사진으로 찍으면 되는걸 왜 나는 그리고 있는가'라며 현타를 느끼기도 하지만, 다 그리고 난 후에는 은근히 잘 그려서 계속 눈을 주게 된다. 뿌듯하다. (현재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멋진 그림인 것 같기도 하다.)

     

그 외로도 펜으로 대충 그리기도 서서히 시도해보는 중이다.

데생을 하며 물건을 정교하고 똑같이 그리는 연습을 해보았다면,

펜으로는 틀린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한다.

한 번 그은 선을 좀 더 똑바르게 덧칠하지 않는 것이 포인트이다.

어긋나게 그렸어도, 잘 못 그렸어도 그냥 그대로 놔둔다. 그게 멋이다.

펜이기에 지울 수도 없다. 삐뚤삐뚤하게 그리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노력해야하는 사항이 하나 있다.     


바로 선을 길게 그리는 것이다. 선을 길게 뽑으려면, 사물에 대한 관찰을 꽤 유심하고 섬세하게 한 후에 기억해야한다.

짧은 선은 그리면 안된다. 그림을 그리는 의미가 없다.     


나는 이상하게, 한 가지에 몰입하면 질림을 느끼는 타입인 것 같다.

어느 날은 미대 입시생처럼, 어느 날은 취미로 미술을 하다가 유명해진 할머니처럼,

그림을 여러가지로 시도해보는 것이 재미있다.     


다만, 빛과 그림자를 바꿔서 그림그려보기, 그림을 그려놓고 가위로 잘라서 다른 그림을 만들어보기 등 그림 자체를 색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활동은 버킷리스트에 고이 넣어둔 상태다.      


오늘은 펜으로 그리기에 대한 심오한 얘기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글의 초반부, 앞에서 배웠던 내용을 보자면,

색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사물과 빛, 그리고 눈이 있어야 한다. 색이라는 것은 지각을 하기 위한 3가지 도구에 해당하는 ‘눈’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색이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유사하게, 그림도 관찰자의 물리적 시점, 시간 등에 따라 바뀐다고 했다.     


한 자리에 앉은 사람이 어느 공간을 그릴 때에도 절대적으로 맞는 이미지는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카메라로 찍으면 그 모습이 하나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면 집중하는 대상에 따라 투시점이 달라진다고 한다. 오른쪽 물체를 보면 오른쪽 물체가 투시점이 되고, 왼쪽의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이 기준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많이 배웠던 투시도를 정확하게 그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왜냐면 그림을 그릴 때 우리는 한 점만 응시하며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대상을 보던 간에 시선의 움직임이 있기에 투시점도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한 물체 내에서도 미묘하게 물체를 따라 시선이 움직이고, 그에 따라 중심이 되는 투시점도 바뀐다.     


그래서 데생에서 배웠던, ‘정확하게 사물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사물의 머리를 보느냐, 허리를 보느냐에 따라 미묘하게 보이는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상이 있는 의자에 앉아서 내 앉은 모습을 펜으로 (수정하지 못하게) 그려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된다. 의자에 걸터 앉아서 내 다리 부분을 먼저 그리고, 상체와 어깨를 그린 후 팔을 그리다보면 시선의 이동에 따라 그림이 많이 바뀌었구나를 느낄 수 있다. 다리부분을 그릴 때의 시점은 상당히 비스듬한 시점에서 그리게 되고, 팔을 그릴 때는 오히려 위에서 바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리게 되여 시점에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완성되는 그림 전반을 보면 사실이 왜곡되어 그려져보인다. 자리를 고쳐앉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느 곳을 그리느냐에 따라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여기서 전하고 싶은 말은, 그림을 정확하게 그리는 것에 너무 압박을 받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데생을 하면 사물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에,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큰 의의가 있다. (기본 실력과 관련된 분야다.) 그러나 그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기에, 데생을 마스터한 후에 모든 것을 데생처럼 정확하게 그려내려고 압박을 받지 않아야한다는 말이다. 나도 미술에 입문하는 사람으로서, 입시미술처럼 뭔가를 정확하게 표현할 것인가, 혹은 자유롭게 상상을 펼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다. 초반에 좋은 습관을 들이고 싶은 욕심이랄까. 예전에 서울대 미대에 갓 입학했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그녀는 입시미술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 수 있기에 꼭 필요한 절차라고 했다.  


이렇게 선 하나로 그림그리기 챌린지를 가볍기 해봐도 재미있다. 생각보다 아티스틱한 그림이 나온다. 실수로 손이 떼어질 수 있으니 실수에 너그러워져도 그림은 재미있게 나온다.


펜으로 그리기 시도의 초반 버전. 테마만 있어도 그림이 힙해보인다. 위 테마는 컴퓨터쟁이의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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