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주방과 거실에 압력밥솥 추가 '췩 취릭 칙 취익-, 췩 취릭 칙 취익-'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포근한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쳐 들어오고 갓 지은 따끈한 밥 냄새가 방에 퍼집니다. 잠이 덜 깬 몽롱한 정신으로 그 소리와 향을 따라갑니다.
엄마가 나무도마에 호박, 감자, 야채를 도각 도각 써는 소리가 들리고요, 곧이어 뚝배기에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는 소리가 들립니다. 냉장고를 열어 반찬 꺼내는 소리, 그릇을 타각 타각 식탁에 놓는 소리. 이어 우리 자매를 부르는 부르는 소리.
"현아, 인아~ 아침 먹게 일어나~ 밥 다 식을라!"
이 모든 감각은 내가 아침을 맞는 일상이었습니다.
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꼭두새벽 일어나 밥을 차려 주었습니다. 아빠, 저, 동생이 엄마 밥 든든히 먹고 나가 힘차게 하루를 보내고 오길 바랐습니다. 우리 자매는 점심과 저녁을 급식으로 먹고 오니 엄마 밥 먹을 때는 아침밖에 없었습니다. 엄마는 그래서 아침을 더 신경을 썼는지도 모릅니다.
엄마가 차려준 아침상엔 고슬고슬 흰 밥, 얼큰하게 끓인 찌개, 향긋한 제철 나물이 올랐습니다. 부산에 살다 보니 고등어며, 갈치며 살이 실하게 오른 생선도 원 없이 먹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부실하게 먹는 것 같으면 엄마는 '크게 한 입만 더 먹고 가'라며 생선을 발라 숟가락에 올려주곤 했어요.
그게 엄마의 행복이자 보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밥심으로 공부하고 컸어요. 내가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보니 가족 끼니를 살뜰히 챙기는게 여간 일이 아니다 싶습니다.
엄마가 항암을 시작하고부터는 밥상 차리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습니다. 투병에 온 기력을 써서 차릴 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위암 환자다 보니 물리적으로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 밥상은 전에 없이 간결해졌어요. 외식을 나가거나 각자 회사에서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엄마는 아쉬움 반, 후련함 반 섞어 '하루 세 번 밥 차리는 고민 안 해도 되니 편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위가 처갓집 올 때만큼은 말 그대로 차린 것 없는 밥상이 무안했던가 봅니다. 엄마는 갓 장가든 사위에게 밥 한 끼 제대로 차려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고 아쉬워했어요.
부산 친정에서 며칠 지내고 신혼 집으로 다시 올라가는 날이었어요. 주방에서 밥솥 추 돌아가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다보니 엄마가 분주하게 주방을 오가며 아침 밥상을 차리고 있었어요. 사위 대접할 생각에 호랑이 기운이 샘솟는 듯 신이 나 보이기까지 했지요. 엄마는 따뜻하게 찰기 진 밥을 짓고 사위가 좋아하는 통통하고 빛깔 좋은 갈치를 구워 냈습니다. 우리가 한 큰 술 먹는 모습을 보며 엄마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흰 밥에 갈치를 맛있게 먹고 가는 걸 보니 엄마가 너무나 행복하다."
한 숟갈 넘기려다 목이 메고 말았습니다.
엄마 밥이 그립습니다. 식당에서 파는 것처럼 대단히 감칠 났던 것도 아닌데. 내 입에는 맛깔나는 음식이었지요. 오래 끓여 밥에 비벼 먹던 찐한 된장찌개, 돼지 목살 툭툭 썰어 넣은 칼칼한 김치찌개, '식당 내고 장사하자'던 얼큰한 닭도리탕. 엄마가 즐겨 먹던 가지나물과 잡채. 꼬소한 참기름 냄새며 깨소금 식감이며.
나이 먹을수록 더 그 음식들이 좋아집니다. 향수가 어려서일까요. 딸들은 엄마 닮는다더니 이제 엄마 입맛도 따라가는 건지. 저뿐만 아니라 아빠도, 동생도 엄마가 차려준 밥상 생각이 나는 게 당연하겠지요.
우리 집 냉장고에는 아직도 엄마가 만들어 보내 준 만능양념장이 있습니다. 엄마가 잡내 잡고 맛 올리라고 준 것이에요. 여전히 엄마가 준 그대로 비닐랩을 씌운 채 사 년째 있습니다. 엄마 살아계실 때는 양이 얼마 되지 않아 아까워 먹지 못했는데 이제는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버려야 하는 줄 잘 알지만 엄마 손맛이 담긴 마지막 남은 식재료라 쉽사리 버릴 수가 없네요.
며칠 전 우연히 친정에서 엄마가 기록해 둔 요리 수첩을 발견했습니다. 엄마 필체로 빼곡하게 적힌 그 요리법을 보고 있자니 뭉클해졌어요. 아픈 동안에도 아빠나 가족들 해 주려고 적어 뒀나 봅니다. 그 음식을 다 못하고 간 엄마 생각에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거 봐, 엄마가 적어둔 요리법인 건가 봐."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남편이 제 마음 다 안다는 듯 답합니다. "내가 해 줄게." 그 말 한마디로 잠깐이나마 엄마 요리 맛이라도 본 듯한 기분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