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재배의 끝은, 작년처럼 적은 수확물을 가지고 애써 반찬 만드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봄보다 가을에 씨앗을 뿌려 본 것은 오히려 기대감을 낮추고 실험하는 마음이었다. 아직 텃밭 초보를 벗어나지 않아 씨의 일에 의심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금치, 서울배추, 김장배추 씨를 한 고랑씩 뿌려놓고, 어느 때부터 국거리가 궁해지면 가는 곳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던 그 ‘무’는 아쉽게도 땅심을 무너뜨린, 가을장마가 몰고 온 진딧물 공격을 견디지 못하여(사실은 보는 이가 견디지 못함) 이르게 한 보시기의 섞박지 김치가 되고 말았다.
작년에 한번 뿌려보고 올해 작정했던 시금치는 여전히 한 접시의 나물밖에 거두지 못했다. 제때 씨를 뿌리고 지켜보았으나, 역시 가을비(탓을 한다) 때문인지 발화가 거의 되지 않았다. 시금치는 따뜻하고 습한 날씨보다 건조하고 냉한 조건이 더 맞아 그럴 거라고 짐작할 뿐이나, 주변에 잘 된 밭을 보면.. 알 수가 없다.
가을은 역시 배추의 계절이었다. 뿌린 만큼 올라오는 놀라운 생명력. 우리 재래종 배추라는 서울배추는 가꾸지 않아도 벌레 한 점 없이 가을 내내 혼자서 잘 자라 따뜻한 토장국 재료로 충분했다. 요즘 김장용인 속이 꽉 차는 결구형 배추가 보급되기 전, (1900~ 1920년대에 육성된 재래종 배추) 서울 이남에서 재배하였다는(그래서 서울배추?) 원조 김장배추라 할 수 있는 서울배추. 알고 보니 지금과 같은 형태의 김장이 시작된 건 그렇게 오래 전이 아니었다는 사실. 환한 연녹색에 날씬한 모양새가 김장배추와 구별되며 질감이 무르지 않아 국을 끓여놓아도 건더기 먹는 맛이 있었다.
김장배추 씨는 이름에 어울리게 김장을 하려 뿌린 것은 아니고, 그냥 땅이 남아 늦게 흩어 보았다. 서울배추보다는 땅에서 좀 길게 잠복하더니 역시 촘촘히 올라왔다. 거의 11월이 되어서야 조금 솎아내다 보니 견물생심 같은 게 들어 겉절이 김치라도 담아볼까라는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진한 녹색에 짤막한 모양새로 잎에 돌기 같은 게 돋아있다. 하여 국거리로 전락하지 않고 김장까지는 아니라도 아시(애벌) 김치가 되었다.
3년이나 해본 텃밭에 소꿉놀이 텃밭이라 이름을 붙인 건 요런 가을재배의 단출함에서 왔다. 제대로 크지 않은 조금씩의 채소는 더 귀해 오히려 잘해 먹고 싶은 욕구를 일으켰고, 한 줌이나 한소쿠리도 안 되는 푸성귀를 위해 몸을 움직여 만든 보통의 반찬을 작은 접시에 담아놓고 보면 마치 작은 왕국의 만찬 같았다. 소꿉놀이를 닮지 않았나?
이제 소꿉놀이 텃밭은 끝이 났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내년 텃밭은 없지 싶다. 돌아오는 봄에 이사 계획이 있고, 보이는 곳에 놀고 있는 땅이 있으면 모를까 새로 살게 된 곳에서 금방 땅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 해를 쉬며 다음 텃밭을 생각할 것이다. 그때는 소꿉놀이가 아니라 조금 더 힘을 내어 그냥 밭을 일구어 보고 싶다. 가게에서 파는 모종이 아니라 초봄에 씨를 가지고 시작하는 한 해 텃밭 농사를 그려본다. 직접 모종을 내거나 직접 땅에 파종하기. 다양한 풀들과 상생하는 자연 농법, 작물과 거름이 돌고 도는 순환 농법. 언젠가는 꼭 실천해 보고 싶은 땅과 텃밭에 대한, 나아가 삶에 대한 꿈이다. 아무리 꿈꾸고 땅심을 돋아도 하늘이 하는 일, 날씨가 도와야 되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환경 문제는 사람들 마음의 문제이자 삶의 방식의 문제입니다.
땅을 갈지 않고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풀과 벌레를 적으로 여기지 않는 자연농법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나 누구에게나 통하는 변함없고 보편적인 농사법입니다.
자연농법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재배 방식에 의해 생명의 양식을 확보하는 인간 본연의 생활 방식입니다. 자연농법은 자연계와 생명계에 문제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재배하는 사람은 물론, 그것을 먹는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건강하게 만듭니다. 자연농법은 모든 생명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 신비한 밭에 서서 -
*신비한 밭에 서서/ 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최성현 옮김/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