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텃밭을 살피러 간 날은 한여름 이후 참 오랜만이었다.
그사이 계절은 바뀌어 밤낮의 기온차가 커진 가을 문턱을 넘은 듯한데, 오, 그래서일까. 밭고랑 사이를 걷는데 어찌나 온 데가 촉촉하던지! 습기를 분사한듯한 아늑한 촉촉함이 공공 텃밭 전체에 깃들어 고요한 아침의 기운과 함께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건 밤사이 내린 이슬, 맞다!
이맘때쯤 부추꽃, 방아꽃이 피고 날개가 큰 박각시 나방이 붕붕 꽃 주변을 날 때, 백석의 시 <박각시 오는 저녁>에는 '이슬이 비 오듯 내리는 밤'이라는 표현을 썼다. 텃밭 3년 차지만 이맘때 밭의 느낌은 해마다 새롭고 어느 때보다 특별하다. *네 번째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계절, 여름을 보내고 차분하고 성숙해진 모습이랄까. 폭염이 지나간 자리는 태풍만큼 어지럽고 한동안 방치한 모습이었으나 새로이 땅이 열린다는 9월을 기점으로 퍼즐 조각 같은 각자의 밭은 조금씩 정리가 되어 갔다. 거두고, 치우고, 씨 뿌리고, 이어 기르고, 다시 시작이었다.
조만간 이곳이 가을에 알맞은 '삽상하다'는 말이 어울렸으면 한다. 아직은 조금 모자란다. 상쾌하고 시원하다, 씩씩하고 시원스럽다, 조금 가볍고 민첩하다,라는 뜻이 있는 삽상하다. 이제는 번호도 잊어버린 이 삽상할 텃밭에서 요즘 땅콩 수확을 3차에 걸쳐서 끝냈다. 토마토에게 이롭 다하여 심은 땅콩이 여름과 가을을 수월하게 이어 주어 기특까지 했는데, 시키지 않아도 그 본분을 끝까지 해냈다.
마지막은 동물들 배 불리기, 작년처럼 까치도 왔지만 굼벵이도 한몫했다. 뽑아 올려 보면 까맣게 구멍이 뻥 뚫린 땅콩이 제법 많았고 주변 흙에는 하얗고 기름진 생명체가 꿈틀대고 있었다. 앞쪽에 붙은 붉은빛의 짧은 두 다리로 연신 움직이는 이것은 게으르거나 느림의 대명사에 어울리지 않는다. 낙엽 멀칭의 효과인지 이 외에도 흙속에는 지난해와 달리 제법 많은 생명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름을 몰라 굼벵이, 지렁이, 땅강아지 정도만 불러주지만 불쑥 나타났다 민첩하게 사라지는 것들이 여러 가지였다.
땅을 조금 도와준 덕분인지 땅콩을 남모르게 밭에서 나누고도 수확을 꽤 했다. 남 알게 지금 나누는 중이니 땅콩은 이래저래 쉽게 가꾸어 거창한 말로 '상생'을 실천할 수 있는 기특한 작물이다. 꽃이 땅에 떨어져서 생긴다는 의미로 낙화생(落花生)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것은 꽃을 달고 있는 씨방자루가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열매를 맺는 특이한 생태로 모습 또한 꼭 탯줄로 아기가 연결된 것과 닮아 있어 신기하다. 기르다 보면 알게 되는 이런 사실로 사 먹던 땅콩과 직접 키워 먹게 된 땅콩의 의미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모든 먹거리가 그렇지 않을까. 알게 되어 사랑하고 알게 되어 불편해지는, 먹는 일이 세상과 연결된다.
더위가 채 가시기 전 씨를 뿌린 김장무 얘기도 해야겠다. 새싹이 올라오자마자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달려들어 갉아먹던지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감식초를 뿌려보는 것까지는 했지만 주변 밭에서들 이용하는 한냉사라는 걸 덮어씌우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것, 이런 경우 또 소꿉놀이 텃밭을 상기한다.
그런데, 기적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뜯기고 뜯겨도 중심에서 새잎이 계속 올라오더니 어느 시기를 지나니 더 이상 벌레들이 오지 않고 잎이 타박하니 쑥쑥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의아스럽긴 했지만 그런가 보다 싶었는데,
나의 텃밭 선생 <재미 삼아 텃밭>의 그분께서 똑같은 경우를 보여주며 벌레가 문제가 아니라 땅이 중요하다 했다. 땅심이 받쳐주면 벌레들이 끝장을 보기는 어렵다고. 얼치기 텃밭녀에겐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기분이었지만 현장에서 배운 느낌이랄까.
“중간에 벌레 잔치 중인 모습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아 사진을 찍지 않았어요! 흙흙!”
뻥튀기가 너무해.
이래저래 땅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러고 나면 흙에서 무언가를 앗아가기보다는 더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석회를 뿌려 땅을 느슨하게 풀어주고, 양분을 주고, 뜨끈한 비료로 몸을 덥혀주고, 재를 뿌려 점성을 줄이고, 공기와 햇살이 깊은 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살살 일어준다. 그러면 딱딱하게 굳었던 흙이 조용히 숨을 내쉬며 자잘하게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다. 가벼운 삽질에도 쉽게 내쉬며 자잘하게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다. 가벼운 삽질에도 쉽게 땅이 파진다. 손으로 만져봐도 따뜻하고 나긋나긋하다. 흙을 길들인 것이다. 진흙땅을 길들인다는 건 인간의 위대한 승리다. -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 중 -
손바닥만 한 땅을 갖고 싶다.
*한정원의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