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고 이어지는 일
4월부터 장마 기간까지 무던히도 텃밭을 들락거렸다. 심고 가꾸고 먹고 약간의 저장을 위해 5평 텃밭이 일터가 되어 부지런을 떨었다. 주 작물인 토마토가 마른장마 탓에 매일매일 익어갈 때, 원했던 토마토 캔닝을 실컷 했지만, 이게 뭐 하는 일인가 살짝 후회스럽기도 있다. 역시 저장은 나랑 맞지 않아, 빨간 병이 쌓일수록 흡족함보다는 나눌 일도 먹을 일도 걱정이 되는 작은 사람이 보였다. 공을 들일수록 귀한 것이 생기는 두려움과 씁쓸함은 남도 그렇게 여기길 바라는 부질없는 마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생활도 마음도 미니멀하고픈 이에게 열심히 하는 텃밭 일은 그에 반하는 일이었다.
정해진 일이 없는 일상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텃밭은 좋은 구심점이 되었고, 보약 먹어 건강해진 적은 없지만 건강한 게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여름을 맞으며 들기도 했다. 하지만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주변에 여럿 있어 건강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게 조심스러운 사정도 있다. 말할 수 없었던 건강도 '따놓은 당상' 같은 게 아니라서 바빴던 여름 일이 거의 마무리되니 다시 무기력이 찾아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일상을 촘촘히 기록하는 곳에 텃밭 카테고리 제목들은 여름 동안 이랬다. <장마 중 텃밭>,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올해도 토마토 캔닝>, <이른 아침 텃밭>, <빗속에 달려가는 일>, <폭우가 지나고 폭염만 있는 텃밭>, <섞어 심기의 장점>, <다시 씨 뿌리다>.
제목만으로도 아직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대부분 뜨거운 열기와 흘러내리는 땀의 촉감, 머무르고 나아가는 생각들.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되기 쉬운 일상에 텃밭은 책처럼 생각의 밭이기도 하다.
고춧가루를 위한 고추, 장아찌를 위한 깻잎이 아니라면 잎을 따서 나물을 하는 과정이 은근 뿌듯함을 줬다. 바쁠 때는 하기 쉽지 않은, 시간이 있어도 마음을 내어야만 할 수 있는 별것 아닌 것에 시간 들이는 일에 가깝다. 작정하고 앉아 밭에서 대충 끊어온 가지들에 붙은 잎들을 한 잎 한 잎 떼어낸다. 수북하지만 끓는 물에 데치면 두어 주먹 정도라 먹을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고춧잎나물은 간장, 다진 마늘, 깨소금, 참기름을 듬뿍 넣어 조물조물 무친다. 깻잎은 데친 것을 들기름에 살짝 볶으며 들깨 가루를 넣는 두 번 일로 나물을 완성한다. 들깨의 산물들을 모두 모아 만든 들깨잎 나물은, 들깨 한 알이 부풀어 오른 이야기 같다. 고춧잎나물에는 하얀 꽃과 그 하얀 꽃이 막 떨어지고 맺은 어리디 어린 고추까지 들어있으니 풋고추의 일대기다. 이 나물들에는 맛있다 같은 말로 평가하고 싶지 않은 고유하고 진한 자연의 맛이 기꺼워 시간을 들여 하고싶어 진다.
처음 시도해 본 멀칭과 조금 늘인 섞어 심기에서 미미하지만 텃밭이 순환하고 흐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텃밭의 주된 일인 물주기와 풀매기가 훨씬 줄은 것은 흙이 늘 꼽꼽하고 풀이 올라올 자리가 없어서다.그래도 올라온 풀들은 거두어 버리지 않고 다시 흩어 놓으면 며칠 만에 사라지듯 땅 색이 되었다. 가을재배를 위해 밭을 다시 갈지 않아도 여름작물이 나간 자리에 땅콩이 이어서 소복해졌다. 유일한 빈 땅이 된 상추와 허브류가 나간 자리에는 무와 배추씨를 듬성하게 뿌려 놨더니.. 떡잎부터 배고픈 애벌레들 잔치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파는 모종에는 뭔가 다른 장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밭일은 가을겆이까지인데, 벌써 한해 일 다 끝난 것 같은 분위기다. 소꿉놀이 텃밭의 한계이자 자랑이다. 열망하였으나 초록 생명을 일구고 열매를 따먹는 일이 짧아서 오히려 흡족하다. 마치 매일 아침에 피어나 짧은 시간을 사는 나팔꽃처럼. 끝은 한 송이 꽃이 지는 일이 아니었다. 매일 같은 줄기에 새로운 꽃이 피고 또 피고, 별일 없다면 야생에서는 해를 거듭하여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이 이어질 것이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피고 지는 나팔꽃들은 (까만 씨 한 알이 펼치는)짧은 시간이 모이는 긴 한 해 살이었다.
별거 없는 텃밭일도 별일 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적고 짧은 풍요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