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회색토끼
살랑, 찬 바람결을 타고 머리칼이 뺨을 스친다. 어느덧 가을도 끝나가고 있었다. 거의 다 쓰러져가는 오래된 시설 앞에서 혜연은 잠시 주춤했다. 다시 이곳을, 제 발로 찾아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회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일말의 망설임은 없었다. 그곳이 자비원이든 지옥이든 진완에게 진 빚을 한시라도 빨리 갚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자신의 추측이 곧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이 낡은 철문을 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후퇴는 없었다. 혜연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철문을 밀었다.
끼이익-
이미 10년 전에 폐쇄된 시설이라고 하더라도 본관은 먼지만 쌓였을 뿐, 추악한 과거를 상기시키기엔 여전했다. 아직도 저 현관을 열면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낡은 TV로 교화 수업을 듣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땐 아무것도 몰랐었다. 그저 착한 아이가 되는 길인 줄만 알았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열심히 듣고 암기하면 이 지옥에서 탈출하여 구원받을 수 있을 줄만 알았다. 아이들의 건강을 체크해 주고 돌봐주던 어른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을 지키던 친구들이 어느 날 한 명, 두 명 사라져 갈 때 그제야 그녀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가족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탈출이란, 또 다른 지옥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그때... 다른 걸 선택했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하하."
왼쪽 별채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혜연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내 한숨을 포옥 내쉬며 말을 받았다.
"부르시는데, 당연히 빨리 와야죠."
"날이 춥네. 일단 안으로 들어와."
그림자가 다시 쑥 들어가자 혜연도 뒤따라 별채로 향했다. 별채는 열 평 남짓한 작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빛바랜 책상 위엔 마치 얼마 전에 새로 들인 듯한 명패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원장 전재훈'
이미 폐쇄된 시설의 장인 게 무엇이 그리 자랑스러운지 그는 주기적으로 명패를 바꿔댔다. 재질이 보아하니 이번에는 대리석인 것 같았다. 대리석에 황금색으로 새겨진 이름은 오늘따라 더욱 차가워 보였다. 그는 장막 커튼을 열고 책상 뒤편의 간이 탕비실에 들어가더니 에스프레소 머신을 작동시켰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텐데 너무나 다정한 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그는 참을성이 없어서 본론부터 꺼내는 편인데, 웬일인지 마실 것부터 손수 준비해 주다니. 그녀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손님용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말없이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만 작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이 어색함을 깨기 위해 대화를 시작하자니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답답한 공기가 가슴을 지긋이 짓누르자 겉옷을 살짝 벗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이 기계적으로 커피를 내리고만 있었다. 두 잔의 블랙커피가 완성되자 그는 차분하게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행동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날이 서있었다.
"아주 깜찍한 장난을 치려고 했어?"
"무슨 소리예요."
"그런다고, 네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우악스럽게 혜연의 턱을 움켜쥐었다. 번뜩이는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며칠 밤낮을 지새운 듯 실핏줄이 서있었다. 그의 탁한 동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자니 상처로 얼룩져 울고 있는 어린 혜연이 스쳐 지나갔다.
"진완오빠를 죽인 게 당신..."
"내 앞에서 딴 놈을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대답... 흡"
그는 듣기 싫다는 듯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어지럽게 입 안을 헤집고 다니는 물컹한 무언가가 소름 끼칠 뿐이었다. 그녀는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녀가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칠수록 그는 힘으로 더욱 몰아세웠다. 그녀가 반항을 멈췄을 때 흡족한 듯 입술을 떼며 비열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는 거지? 위조 신분 따위로 감히 너를 빼돌리려고 하다니."
"그래도..."
"내 말에 토 달지 마. 오늘은 좀 더 강력한 교화수업을 진행해야겠군. 다신 딴생각 못하게."
그는 혜연을 내동댕이쳐놓고 뒤돌아서 탕비실 쪽으로 향했다. 혜연은 굳은 결심을 한 듯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었다. 불가능하다면 가능하게 만들면 된다. 7살 이혜연은 할 수 없었을지 몰라도 27살 이혜연은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그가 탕비실에서 뭘 가져올지 언제쯤 뒤돌지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혜연은 아주 천천히, 아주 조용히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탕비실 쪽으로 걸어갔다. 동시에 오른팔을 뻗어 본능적으로 명패를 집어 올렸다. 모서리를 세워 소리 없이, 빠르게 공기를 가르며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빠각.
온갖 도구에 정신이 팔려있던 그는 속절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는 걸 보자 그녀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빠각.
이건 준완오빠를 위한 거야.
빠각.
이건 내 친구 진이를 위한 거야.
빠각.
이건 어린 나를 위한 거야.
잠시 자신의 영혼을 내려놓은 듯 미친 듯이 그의 머리가 으스러질 때까지 명패로 내리쳤다. 한번 내리칠 때마다 복수의 대상들이 바뀌었다. 흰색 니트는 붉은색으로 얼룩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환희의 순간에 불꽃놀이 같아서 그저 행복했다. 20년간 미뤄왔던 숙제를 드디어 끝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서서히 공간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머리통이 반쯤 으깨진 시체가 먼저 눈에 띄었다. 그가 탕비실 싱크대 서랍에서 무엇을 꺼내려고 했었는지도 보였다. 쇠사슬, 채찍, 목줄 같은 게 널브러져 있었다.
하아, 이게 강력한 교화수업이었나.
그녀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시체에 목줄을 채워 자살한 것처럼 옷걸이에 매달았다. 손에 묻은 피를 닦을 겸 벽에 메시지를 남겼다. 그녀는 개수대에서 손을 대충 씻고 겉옷을 챙겨 빠져나왔다. 아까보다 좀 더 바깥공기가 차가웠으나 마음만은 홀가분했다.
11월 가을의 어느 끝자락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야~ 나 와.... 응? 내 밥 어딨어? 밥 시켜달라고 했냐, 안 했냐."
"한서영. 너네 로펌은 식사제공 안 해? 여기가 무슨 밥집인 줄 알아."
서영은 마치 본인의 집인 것처럼 사무소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그가 얼마 전 중고거래로 들여온 소파에 몸을 뉘었다. 로펌 근처에 더 근사하고 멋진 오피스텔에 살면서 자신의 사무소에 매일 같이 출근 도장을 찍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답변서 작성을 위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 속내를 완벽히 알 수는 없다. 그래도 그녀가 오면 사람 사는 느낌도 나고 사무소에 활기가 차는 것 같아 그는 싫은 척 타박을 할 뿐 속으로는 내심 반기고 있었던 터였다.
식사도 미리 시켜놓으면 식을까 봐 일부러 주문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주 찾는 근처 덮밥집은 단골이라 그런지 배달도 빠른 편이었고, 그녀는 이 모든 걸 알지 못했다.
"오늘은 뭐 재미난 사건 없어? 뭐랄까 인류애 넘치는 걸로."
"최근에 의뢰 들어오는 게 없네. 왜 오늘도 털렸어?"
"사랑과 전쟁 스토리에 질려서 그렇지. 참 다양한 이유로 이혼한단 말이야. 오늘은..."
딸랑-
아무리 그래도 시킨 지 1분 만에 배달 오는 건 상식상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덩치만 크고 얼굴은 수더분하게 생긴 웬 남자가 쭈뼛거리고 있었다. 서영은 얼른 문가로 달려가며 남자를 소파 쪽으로 안내했다. 남자의 맞은편에 그들은 나란히 앉자, 남자는 갈색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파파라치 컷처럼 담긴 사진 몇 장과 이력서 형식의 문서가 여러 장 들어있었다. 서영은 얼른 문서를 낚아 채 빠르게 스캔했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제 아내가 사라져서요…. 찾을 수 있을까요."
남자는 소심한 어투로 어물어물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힐끔 서영을 쳐다보았는데 그녀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심지어 파일을 든 두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너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이름도... 주민등록번호도... 다 내 동생 건데.. 사진이 내 동생이 아니야."
-To be continued-
[Behind the Scene]
안녕하세요. 소설꿈나무 회색토끼 다시 인사드립니다.
이 소설은 애초에 릴레이 소설을 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1화만 쓰고 저와 함께 이어서 쓸 작가를 찾지 못해 몇 년 간 방치되었던 작품입니다. 너무도 능력이 훌륭하신 다른 작가님께서 본인 스케줄도 바쁘신데 흔쾌히 약간의 짬을 내어 릴레이로 이어나가는 것에 응해주시게 되어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브런치를 이용 안 하시는 관계로 제가 대표하여 하나의 브런치 북으로 게재할 예정입니다. 이점 착오 없으시길 바라며, 릴레이 소설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이 관전 포인트 되겠습니다.
매주 금요일 연재 예정이나 현망진창으로 가끔... 연재가 늦어질 수 있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