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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Nov 01. 2020

Ⅲ. 스릴러 속 여자

한국에서 스릴러물은 범죄물과 등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잔혹한 누아르 범죄를 해결하는 과정을 스릴러 방식으로 전개해 스릴러와 누아르의 경계가 모호해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범죄자도, 이를 해결하는 영웅 모두 남성이다. 여기서 여성은 늘 범죄자의 폭력의 희생물이자 영웅에게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나약한 존재로만 그려진다.        


일상 스릴러 속 여성상 욕망하는 자       


‘SKY 캐슬’(JTBC, 2018, 2019년)


능력껏 일을 하고 주체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이 같은 남성 편향적 미디어에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장기간 노출되는 현대사회에서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결국 가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자신만의 영웅인 남성이 필요하다는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주유신의 ‘시네 페미니즘 ; 여성의 시각으로 영화를 읽는 13가지 방법’ 중 ‘천만 관객 시대를 맞이한 한국 영화의 성 정치학’에서 한국 영화의 신 르네상스의 어두운 이면을 지적했다.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은 물론이고 젠더 관계나 성차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도 ‘여성적인 것’이 만들어내는 ‘차이’와 ‘위협’을 타자화하거나 무력화함으로써 ‘남성적 판타지’를 철저하게 충족하는 경로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래드힐(Gledhill)이 “젠더 재현이 문화적 협상의 중심을 차지한다”고 했듯이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텍스트적 무의식은 온갖 종류의 역사적 시련과 그에 따른 개인적 상처에도 불구하고 남성에게는 행위와 앎 그리고 전능함과 주체의 위치를 부여하는 반면 여성에게는 주변화와 사소화 그리고 무력한 희생자와 대상의 위치를 부여하는 ‘텍스트 전락’ 속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스릴러 형식이 가미된 누아르 범죄물은 관객을 범죄에 길들임으로써 남성 중심 권력체계의 정당성을 각인하는 진부한 메시지를 던지는데 머무르고 있다. 남성 본위의 성 정치학으로 물든 스릴러는 여성을 주변부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비슷하게 반복되는 스토리를 양산해 ‘한국 영화=누아르 범죄물’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스릴러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남성 우월주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영화와 달리 방송에서는 OCN, tvN에서 시작된 범죄 수사물이 대중의 관심을 끌면서 스릴러가 독립된 장르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최근의 스릴러는 타임슬립 스릴러, 판타지 스릴러, 오컬트 스릴러 등 타 장르를 끌어와 범죄는 사건의 발단으로서만 기능할 뿐 관객에게 실제와 허구를 오가는 긴장과 재미를 선사한다.      


스릴러에서 범죄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남성과 여성이 대등한 파트너로 애정이 아닌 단단한 파트너십 관계를 형성해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성 혹은 여성들이 극이 흐름을 이끄는 중심인물로 등장해 남성을 주변부를 밀어내는 역전이 이뤄지고 있다.      

 

2018년 신드롬 급 인기를 끌며 지금까지도 웰 메이드 스릴러로 회자되는 ‘SKY 캐슬’(JTBC, 2018, 2019년)은 최고급 빌라 스카이 캐슬에 사는 한서진(염정아), 노승혜(윤세아), 진진희(오나라), 이수임(이태란), 4명의 엄마와 VVIP들의 자녀만 책임지는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김서형), 총 5명의 여성이 주인공이 등장한다.     

  

4명의 여성 각각에 남편인 남성이 있고 입시 코디네이터에게도 그를 수족처럼 보좌하는 조 선생(이현진)이 있지만 이들 중 극의 흐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은 최근 입시 흐름의 대세로 알려진 ‘바지바람’을 재현한 노승혜 남편 차민혁(김병철) 한 명에 불과했다. 자녀들을 제외한 남은 남자 성인 4명은 비중이 미미했을 뿐 아니라 간혹 극의 흐름을 깨뜨리며 원성을 자아내기까지 했다.       


‘검색어를 입력하라 WWW’는 여성성의 판을 깨는 시도에도 ‘미러링’ ‘여초’ 등 불명예 키워드가 오르내리며 남성과 여성의 역할만 뒤바뀌었을 뿐 관습화 된 남성성을 우위에 두는 성 차별 관행을 이어간다는 비난을 받았다. 반면 ‘SKY 캐슬’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편 가르기를 하지 않고 인간 본능으로서 욕망에 초점을 맞춰 스릴러의 성 차별 관행을 깼다.      

 

SKY 캐슬에서 5명의 여성 중 어느 누구도 피해자도 해결사도 아니다. 각자가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각자가 자신의 욕망에 희생될 뿐이다. 한서진의 의붓딸 살인 사건으로 극이 시작되지만 이 작품은 현대사회에서 모두가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아니 과거 어느 순간 가해자였고, 현재에도 누군가에게 가해를 가하고 있을 수 있다는 오싹한 결말로 스릴러의 진정한 섬뜩함을 안겼다.  

        

오컬트 스릴러 속 오싹 의상 종교적 퍼포먼스의 힘      


영화 ‘검은 사제들’(2015년),  ‘방법’(tvN, 2020년)

 

타임워프 스릴러 ‘시그널’(tvN, 2016년)이 작품성 흥행성을 모두 충족하고 종영 한 이후 시공간을 뒤섞는 타임슬립, 타임 크로싱 등 다양한 버전으로 확장되며 방송가에서 스릴러가 주력 장르로 부상했다. 스릴러 인기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데는 이처럼 두 가지 이상의 장르가 혼재된 새로운 혼합 장르 출연에 있다.      


최근 인기를 끄는 것은 종교적 요소를 가미해 인간과 영혼의 대립과 공조를 다룬 스릴러다. ‘손 the guest’(OCN, 2018년. 이하 ‘손 더 게스트’) 이후 오컬트 스릴러가 스릴러의 또 하나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 ‘손 더 게스트’는 샤머니즘과 엑소시즘을 결합해 원죄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할리우드 엑소시즘의 단편적 전개와는 다른 논쟁적 화두를 던졌다.      


할리우드 역시 동양의 샤머니즘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지만 피상적 접근에 그치는데 반해 한국 방송가에서 시도되는 오컬트는 영화적 잔혹함과 진지함을 충족한 전혀 새로운 긴장감을 선사하고 있다. 영화 ‘부산행’으로 한국 좀비 영화의 새 장을 연 연상화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방법’(tvN, 2020년)은 무당을 전면에 내세워 오컬트 스릴러 진수를 보여줬다.       


시공간을 뒤섞은 타임워프, 타임슬립, 타임 크로싱과 같은 스릴러에서 긴장감은 의상감독 김정원이 언급한 ‘일상성’이 주는 반전에 의해 좌우된다. 이 같은 일상성은 오컬트 스릴러에서 힘을 잃는다. 오컬트 스릴러는 귀신을 쫓는 의식 혹은 행위에서 입는 복장 즉 종교 종사자의 예복이 긴장감의 수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손 더 게스트’와 ‘방법’은 귀신이 아닌 구마와 굿, 즉 귀신을 쫓거나 물리치는 종교의식을 진행하는 사제 혹은 무당이 입는 예복이 오싹한 공포를 조장했다. ‘손 더 게스트’에서 영매 윤화평(김재욱)과 공조하는 사제 마테오 최윤(김재욱)은 성직자 복장을, ‘방법’에서 진종현(성동일)에게 씐 악귀인 개 귀신, 이누가미를 모시는 무당 진경(조민수)은 원삼을 입어 의식의 엄숙함을 강조함으로써 싸늘한 기운을 낸다.         


스릴러에서 종교의식의 엄숙함은 오싹함으로 전이된다. 따라서 차분한 경건함보다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절대적이다. ‘방법’에서 의상을 전담한 의상감독 홍수희는 “(장르의 특성상) 자문을 받아서 의상을 제작했다”면서 “고증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진경에게 역동적 이미지를 부여하고자 했다”라고 밝혔다.      


토속신앙인 무당이 하는 굿은 그 자체로 퍼포먼스 요소를 갖는다. 반면 구마 의식에서 화려한 역동성을 끌어내려하면 오히려 실소를 자아내 몰입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영화 ‘검은 사제들’(2015년)에서 의상을 전담한 의상감독 윤정희는 “옷자락이 날릴 때 연출되는 극적인 효과를 살리는데 초점을 맞췄다”라면서 정해진 복식을 변형하기보다 제한된 상황이 오히려 더 큰 반전 효과를 줄 수 있음을 설명했다. 실제 윤 감독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키아누 리브스)가 블랙 롱코트를 입고 액션을 하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스릴러의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성과의 유사성’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특히 성공한 작품일수록 남성성의 관행에서 벗어난 설정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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