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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Nov 01. 2020

Ⅱ-1. 영화 ‘덕혜옹주’ 슬픔에 갇힌 공주

덕혜 손예진의 클로쉐


영화 ‘덕혜옹주’(2016년)가 제작에 들어간다는 것 외에 구체적인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던 시기, 의상감독 권유진의 사무실에 현대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시대의 흔적이 묻어난 의상이 몇 벌 걸려 있었다. 무슨 영화 의상인지 묻는 질문에 권유진 감독은 오프 더 레코드라는 전제를 달고 ‘덕혜옹주’ 이름을 슬쩍 꺼내며 설렘을 감추지 않았다.        


역사 기록이 충분치 않은 덕혜의 삶에서 알려진 것이라고는 ‘불운한 공주’가 전부다. 사극은 고증이 99%로 절대적이지만, ‘덕혜옹주’는 사극으로서 조선왕조에서 시대극으로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격변의 시기가 배경이어서 이 공식을 적용할 수 없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고민하던 권 감독은 ‘슬픔에 갇힌 공주’라는 키워드로 덕혜옹주 이미지를 설정했다.       


고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당당하고 사랑스러운 옹주 덕혜가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고, 일본인과 결혼하고, 남편 소 다케유키에 의해 입원한 정신병원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는 여정을 그대로 담았다. 덕혜는 어머니 귀인 양 씨의 사망, 남편과 이혼에 이어 딸 마사에 실종을 일본에서 홀로 감당했다. 덕혜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본 패망 후에도 대한제국 황실을 인정하지 않은 이승만 정권의 정책으로 귀국이 매번 좌절됐다.      


덕혜옹주의 삶은 역사적 기록이 빈약하지만, 영화 개봉 1년 전인 광복 70주년 2015년 8월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진행된 ‘대한제국과 황실’ 展에서 ‘돌아온 덕혜옹주 유품’ 특별 공개가 이뤄지면서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었던 그의 삶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덕혜옹주’(2016년)

     

‘슬픔에 갇힌 공주’ 이미지를 위해 권 감독이 가장 애정을 쏟은 아이템은 클로쉐다. 클로쉐는 이마와 눈 밑을 가려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는 디자인으로 자신을 마음 놓고 드러낼 수 없었던 덕혜의 심리가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사실과 허구 사이의 논쟁에서 벗어난다면 덕혜가 조현병을 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가슴을 아리게 할 정도로 절절하게 다가온다. 일본 유학길에 오를 때 독살당한 고종을 잊지 말라며 어머니가 들려준 보온병을 일본에서 늘 가지고 다니고 항상 얼굴을 반쯤 가린 모자를 쓴 것으로 심약했던 덕혜의 내면을 알 수 있다.       


클로쉐는 1900년대 전반기인 일제강점기 1920년 당시 유럽에서 유행한 ‘가르손느 룩’에 없어서는 아이템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전후 시기 유럽은 여성해방운동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이뤄지면서 거추장스럽지 않은 편안한 옷차림이 선호됐다.      


가르손느 룩은 흔히들 알고 있는 샤넬의 클래식 룩으로 대표된다. 무릎을 살짝 덮는 루스 웨이스트의 개더스커트 혹은 플리츠스커트와 납작한 가슴을 보완하지 않는 활동적인 편안한 상의에 낮은 굽의 구두를 신고 짧은 보브 커트와 클로쉐로 마무리한다.        


1912년에 태어난 덕혜는 13살 되던 1925년 일본으로 강제 유학길에 올랐다. 클로쉐는 이처럼 당시 시대 고증을 거친 아이템으로 덕혜 역시 클로쉐를 쓴 모습이 자료사진으로 남아있다. 덕혜의 클로쉐는 두 가지 상징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단순히 자신을 감추고 싶다는 심리뿐 아니라 여성해방운동이 이뤄진 시대 상황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권 감독이 감정선에 충실했다는 의도에 걸맞게 클로쉐는 이 두 함의가 복잡 미묘하게 배합돼 배치된다. 그러나 작품 전체적으로 전면에 나선 것은 ‘저항으로서 메시지’가 아닌 ‘숨어들어야 한다’는 심리다. 클로쉐는 덕혜옹주의 무기력해지는 내면을 감추는 도구로써 작품에서 기능했다. 그는 “물도 못 믿어서 보온병을 가지고 다녔는데 얼마나 가슴을 조이고 살았겠어요. 그 나라 공기도 접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모자도 그런 역할을 했겠죠”라며 덕혜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클로쉐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자료사진 속 클로쉐를 유난히 푹 눌러쓴 덕혜를 하늘을 가리고 싶다는 심리로 해석해 작품 속에서 덕혜의 슬픈 감정선의 중심을 잡았다.     

   

18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한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 ‘잃어버린 환상’에서 주인공 뤼시앙은 파리 여성들의 쓰고 다니는 모자에 대해 “모자를 뒤로 넘기면 염치없는 모습이 되고, 앞으로 너무 내리면 음험해 보이고, 옆으로 쓰면 무례해 보인다. 점잖은 여자들은 원하는 대로 모자를 쓰는데도 항상 훌륭해 보인다”라고 생각했다.       

같은 모자라도 어떤 방식으로 쓰느냐에 따라 사람의 이미지가 달라진다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 묘사는 영화 ‘덕혜옹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클로쉐는 눈을 살짝 가리게 디자인된 모자지만, 덕혜는 유독 깊게 눌러써 얼굴을 반쯤 가렸다. 이는 타인의 시선과 감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덕혜의 내면의 두려움과 은둔의 욕구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이뿐 아니라 클로쉐는 황녀라는 고귀한 위치를 드러내는 신분 표시 기능도 수행한다. 고귀한 신분이어서 더욱 처참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의 삶은 클로쉐라는 도구를 통해 사실성과 함께 극적 효과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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