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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Nov 01. 2020

Ⅰ-2. 이미지 메신저, 배우 ; 장르 속 여자들

최근 한국 영화에서 여성은 찢어진 옷과 상처로 대변될 수 있을 만큼 남성 중심 한국 영화에서 찢어진 옷과 상처로 대변될 수 있을 만큼 남성들의 폭력 대상으로만 그려지고 있다. 이도 아니면 남성 옆에서 볼륨 있는 몸매를 드러내는 옷을 입고 섹시함을 과시하는 파트너이거나, 남성보다 더 남성 같은 말투와 행동에서 옷차림까지 미러링(mirroring)으로 그려진다. 어떤 방식이든 남자 배경에 불과한 역할이 전부다.       

   

주연의 자리에서 밀려난 여자 배우들은 제아무리 톱이라고 해도 그나마 남자 배우들의 부속물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였다. 여기에 더해 몇몇 영화는 주연급은커녕 주·조연급 여자 배우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범죄물이 영화계를 지배하면서 작품이 작품명이 아닌 남자 배우 이름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황정민 영화, 하정우 영화, 마동석 영화 등 이름만 떠올려도 작품 내용이나 전개까지 대충 짐작될 정도로 짜깁기식의 지루한 ‘복붙(복사 붙여넣기)’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영화 속에서 피해자 이미지로만 그려지는 여성 하대 현상은 페미니스트뿐 아니라 다수 여자의 분노를 사고 때로는 불매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영화는 철저하게 시대 흐름에 역행하면서 현대사회에서 여성 이미지를 과거로 되돌려 유약해진 남성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여성이 득세하는 세상에 지친 남성들을 위로하기에 급급하다.   

      

이처럼 여자 배우에게는 한없이 야박한 영화계에도 소소하게나마 여자 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개봉된다. 드라마는 이보다 더 자주 다양한 캐릭터들이 시도돼 여자 배우들의 숨통을 트여준다. 여전히 남성 편향적 전개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극 중 여성들은 패션의 적극적인 조력을 받으며 보다 매력적인 이미지로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누아르 속 죽이는 여자       


영화 '미옥'(2017년), '악녀'(2017년), '마녀'(2018년)


영화 ‘악녀’(2017년) 킬러 숙희, ‘미옥’(2017년)의 언더 보스 나현정, ‘마녀’(2018년) 킬러 자윤은 캐릭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김옥빈, 김혜수, 김다미가 주인공을 맡은 여성 누아르다. 해마다 수십 개의 누아르가 쏟아져 나왔지만 여자 배우가 주인공인 작품은 이 세 작품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아무리 여자가 주인공인 누아르라고 해도 이들 영화 역시 여자가 피해자이기는 마찬가지다. ‘악녀’ ‘미옥’은 극 중 킬러 숙희, 언더 보스 현정을 ‘여자=어머니=희생’의 등식에 맞춤으로써 여성 이미지를 한정 짓는 남성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영화에 대한 부정적 반응과 무관하게 김옥빈은 킬러 이미지를 완벽하게 표현해 ‘제70회 칸 영화제’에서 박수갈채를 받은 이유를 수긍케 했다. 몸을 움직이기 힘든 다이버용 전신 보디슈트를 입고도 동작이 큰 액션을 완벽하게 해내 킬러로서 한국 영화 작품 속 뿌리 깊은 ‘여성 이미지’를 깼다.       


‘악녀’ 의상을 전담한 의상감독 채경화는 “다른 어떤 액션 영화 주인공보다 많은 옷이 필요했다. 숙희라는 인물이 감정 변화가 많은 캐릭터여서 그 흐름을 놓치지 않아야 했다”라며 상황과 감정 변화가 큰 캐릭터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집중했다고 밝혔다. 


신인이라는 이미지가 무색한 김다미의 활약은 더 눈부시다. 평범한 고등학생의 외양을 하고 남녀노소, 경로효친의 유교 사상을 무너뜨리며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는 모습은 현대사회에서 관계의 재구성을 상징하는 듯 의미심장한 충격을 던졌다. 특히 후드 집업 점퍼는 천재적 킬러 이미지를 훼손하기보다 오히려 평범한 외양으로 인해 ‘천재적 잔혹함’을 극대화했다.        


킬러라는 특수한 상황에 지극히 평범한 의상의 효과는 의외로 크다. 다수의 스릴러 영화에서 의상을 담당한 의상감독 김정원은 스릴러의 긴박감을 높이는 키워드로 ‘일상성’을 제시했다. 그는 “스릴러는 영화상의 장르일 뿐이죠. 영화 속에서도 일상에서 전개되는, 결국 일상에서 터져 나온 거니까. 사건에 맞춰서 다가가지는 않는다”라며 “사람들이 생각하는 머릿속에 각인된, 획일화까지는 아니라도 그걸 거스르고 싶고, 다른 것을 표현하려 한다”면서 일상성의 반전 효과를 언급했다.      


일상성은 누아르에도 적용된다. 의상감독 채경화는 극의 특성상 전신 슈트처럼 킬러로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의상을 활용했지만 전체적으로 일상성을 부여하는 설정들로 채웠다. 그는 “다른 어떤 액션 영화 주인공보다 많은 옷이 필요했다. 숙희라는 인물이 감정 변화가 많은 캐릭터여서 그 흐름을 놓치지 않아야 했다”라며 킬러로 키워졌지만 평범한 생활을 희망하는 숙희 바람을 따라갔다고 설명했다.  


마녀에서는 일상성이 킬러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면에 적용돼 ‘악녀’ ‘미옥’과는 다른 결의 잔혹함을 끌어냈다.  지극히 일상적인 후드 집업 점퍼는 김다미의 통통한 볼살로 인해 청소년 이미지에 시너지를 더했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모하리만치 당당하고 삐딱한 말투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서 또래의 일상성을 킬러 이미지로 전환하는 역할을 해 천재적 킬러의 천재적 잔혹함과 자연스러운 연결 고리를 형성했다. 

       

김다미는 일상적인 평범한 의상과 킬러로 태어나고 길러진 극 중 인격을 완벽하게 소화함으로써 잔혹한 10대 킬러 이미지를 완성했다.  

       

범죄물 속 추적하는 여자      


‘비밀의 숲’(tvN 2017, 2020년), ‘손 the guest’(OCN, 2018년)


방송은 영화의 시대착오적 행위에서 벗어나 현대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을 내세워 영화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여자 배우의 저력을 입증한다. 이뿐 아니라 다수의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위 여성 작품이 흥행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범죄 스릴러 ‘비밀의 숲’(tvN 2017, 2020년) 황시목(조승우)과 한여진(배두나)은 각각 검사, 형사로, 성적 끌림을 암시하는 남녀가 아닌 사건 해결을 위해 공조하는 권력관계가 대등한 파트너로 등장한다. ‘손 the guest’(OCN, 2018년)는 샤머니즘 무당 윤화평(김동욱)과 엑소시즘 신부 최윤(김재욱), 이들을 이끄는 형사 강길영(정은채),  각기 다른 이상을 가진 세 사람이 서로를 보완하는 동료로 완벽한 팀워크를 형성한다.   

 

같은 스릴러, 같은 형사 캐릭터지만 의상은 판이하게 다르다. 강길영 역을 맡은 정은채는 스테레오 타입 형사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한다. 무심하게 걷어 올린 셔츠에 꼭 맞지 않은 헐렁한 팬츠가 의상의 전부다. 컬러 역시 카키 그레이 블랙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형사 복장은 눈에 띄어서는 안 되고 언제 어디서든 뛸 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기본을 고수한다. 대충 묶은 부스스한 헤어까지 형사라는 고정화된 정체성에 충실하지만, 어린 나이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엄마를 목도한 이의 음울함이 짙게 배어 뻔한 설정일 수 있는 의상에 명분을 부여한다.       


배두나는 형사 한여진에게 럭셔리 브랜드가 사랑하는 배우 자신의 이미지를 용감하게 적용했다. 시즌 2에서는 뱅 헤어의 긴 머리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오버사이즈 맥시 코트를 입고 등장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배두나의 스타일 설정 논란은 ‘비밀의 숲 시즌 2’의 갈등 전개를 분석하면 다소나마 해소된다. 노숙자처럼 차 안에서 밤샘 잠복을 하지도 혹은 육상선수급 추적을 하지도 않는 경장급의 본청 소속 수사혁신단 팀장인 한여진이 굳이 무채색의 색이 제거된 실용적인 옷차림을 고수한다면 오히려 현실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무엇보다 극 중에서 용산서 일선과 본청 소속의 차이에 따른 경찰 내 권력 체계가 갈등의 한 축을 형성하는 만큼 배두나의 스타일리시한 형사 이미지는 용산서 강력계와 수사혁신단 어디에서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한여진의 상황을 재현하는 시각적 도구로서 역할을 충분히 한다. 이뿐 아니라 시즌 1에서부터 유지되고 있는 부당한 관행보다는 정의에 기준으로 행동하는 자유분방한 극 중 성향을 고려할 때 형사의 고정화된 틀에 벗어난 이미지 설정이 타당함을 넘어서서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로코 혹은 스릴러 속 쟁취하는 여자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tvN, 2019년)

    

영화계에 반기를 들 듯 방송가는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tvN, 2019년), ‘SKY 캐슬’(JTBC, 2018, 2019년)은 공동 주연을 맡은 다수의 여자가 남자들을 조연, 조조연으로 밀어냈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는 인터넷 포털 기업 경영진 송가경(전혜진), 차현(이다희), 배타미(임수정) 3인, ‘SKY 캐슬’은 한서진(염정아), 노승혜(윤세아), 이수임(이태란), 진진희(오나라) 네 명의 상류층 엄마와 김주영(김서형) 한 명의 입시 코디네이터, 총 5인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스타일리스트의 철저한 계산으로 설정된 의상과 남성에 비해 의상 흡수력과 표현력이 뛰어난 여자 배우들은 극 중 캐릭터마다 합치될 수 없는 다양한 이미지 배열에 짜임새를 더해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충족했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는 남자가 아닌 여자 송가경, 차현, 배타미, 인터넷 포털 기업의 최상부 경영진 3인을 중심으로 전개해 미러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사회 지도층으로서 여성들을 생동감 있게 그리며 로맨틱 코미디(로코)의 관행을 깼다.       


전혜진은 오버사이즈 파워숄더 재킷으로 남성적 카리스마와 여성적 우아함을 조화하고 여기에 감정이 배제된 경직된 말투로 날 선 경쟁에서 살아남은 리더 송가경 이미지를, 이다희는 섹시한 듯 귀엽고 귀여운 듯 섹시한 차현을 런웨이에서 싱싱하게 건져 올린 화려한 의상으로  표현해 승부사 기질을 가진 본부장 이미지를 완성했다.      


전혜진 스타일리스트 노광원은 “전혜진 배우를 처음 봤을 때 사진이나 작품을 통해 봤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라며 “여성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멋있는 배우다. 이런 멋있는 매력, 멋있는 스타일을 다른 사람들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극 중 송가경 스타일에 반영돼있다”라며 송가경을 이미지를 ‘멋있는 사람’으로 설정했음을 밝혔다.       


이다희 스타일리스트 성선영의 고민은 좀 달랐다. 멋있음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놓고 갈등했음을 토로했다. 그러나 정지현 PD와의 사전 미팅을 통해 남성성에 충실한 멋있음이 아닌 차현 식의 멋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방향성을 설정했고 시청자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그는 “차현 콘셉트를 잡을 때 남성 느낌이 나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감독님은 정작 ‘예쁘게 입어라’라고 했다. 그런 생각에 중점을 두지 말고 예쁘게 입으면 된다고 말했다”라며 차현이 진부한 캐릭터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를 밝혔다.   


영화 속에서 주체적인 여성은 늘 두 가지 잣대로 평가된다. “여자 같지 않다. 남자 같다.” 혹은 “그런다고 남자가 될 수 있겠어.” 영화 밖에서도 이 같은 평가는 이어진다. 영화 홍보 현장에서 함께 한 여자 배우에 대해 묻는 질문에 남자 배우들의 답변은 늘 똑같다. “여배우 같지 않았다.” 

 

철저한 위계와 남성 중심 체제인 영화계 현장 속성 때문인지 여자 배우은 촬영장 안과 밖에서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가능성 혹은 성패가 ‘남성성과의 유사 여부’가 기준이 된다. 이 같은 판단 준거로서 ‘남성성 재연의 관행’은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여성을 각성하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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