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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Nov 01. 2020

Ⅱ. 사극과 시대극 속 여자

사극 혹은 조선 시대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그리는 시대극에서 남자 주인공은 ‘영웅’으로 그려지는 반면 여자는 시기와 질투로 모두를 파괴하는 ‘암투’를 일삼는 인물로만 그려진다.   

    

여인들의 암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제외하면 영웅물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은 ‘명성황후’(KBS2, 2001, 2002년), ‘대장금’(2003, 2004년)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나마 영화에서는 영웅까지는 아니라도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서사극으로서 사극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극 속 여성상 한계와 확장        


‘명성황후’(KBS2, 2001, 2002년), ‘사임당, 빛의 일기’(SBS, 2017년), ‘장희빈’(KBS2, 2002년)


시네 페미니스트 주유신은 그의 저서 ‘시네 페미니즘 ; 여성의 시각으로 영화를 읽는 13가지 방법’에서 여성을 처녀형과 요부형으로만 양분해 기계적으로 묘사하는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지적했다.      

 

“대부분의 영화는 성적으로 순진하고 남성에게 의존적인 ‘처녀형’ 여성과 성적으로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흔히 여성이 갖지 못한 권력이나 지성을 ‘요부형’의 여성을 반복해서 등장시킨다. 이런 두 가지 여성 이미지는 신화의 형태로 영화 속에서 이용되고 단지 보수적인 사회 이데올로기와 시대상에 따라서 약간씩 변형될 따름이다.”      


타이틀 롤이 여성인 설정에서조차 사극은 처녀형과 요부형으로 대치하고 결국 죽음으로 최후를 맞는 요부형의 몰락을 그려 유교주의에 충실한 보수적 여성상을 설파한다. 주유신은 이를 명확하게 짚음으로써 작품 속에서 강요되는 여성성의 부당함을 언급했다.    

   

“이것들은 실제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일 뿐 아니라 사랑과 결혼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처녀형이든, 궁극적으로는 남성에게 위협적이고 자신도 파멸되기 마련인 요부형이든 결국은 여성에 대한 부정적 함의를 지닐 뿐이다. 더구나 이런 이미지들은 남녀 간의 성 역할을 고정된 것으로 그려냄으로써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게 된다.”      


작품 속에서 처녀와 요부 두 유형으로만 구분하는 여성 이미지의 단순 분류는 할리우드의 무성영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평론가 유지나 변재란의 공동 저작 ‘페미니즘/ 영화/ 여성’ 중 ‘그리하여 남성은 여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에서 유지나는 초기 무성영화에서부터 60년대 대중영화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영화들을 영화사 입장에서 서술한 몰리 하스켈의 ‘숭배에서 강간까지’를 인용해 영화 속 뿌리 깊은 여성 폄하의 역사를 설명했다.      

 

“20년대 무성영화에서 ‘요부’와 ‘처녀’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보이던 여성상은 그 후 ‘신여성’이나 ‘파티걸’ 등으로 변형되다 ‘낮에는 정숙한 아내, 밤에는 매춘부’라는 분열적 여성상으로까지 진전됐고 급기야 60년대 히피 문화를 반영한 로드 무비에서는 여성의 부재(남성 버디 영화) 내지는 극도의 여성혐오증으로 변화한다.”  

         

‘사임당, 빛의 일기’(SBS, 2017년)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현대사회의 기준을 충족하는 여성상을 그려 사극의 고정된 관점에서 벗어났다. 시청률은 15.6%에서 16.3%로 시작해 하락세를 이어가다 마지막에는 8.2%로 종영했다. 과거와 현대를 오가는 판타지적 전개가 사극 마니아, 현대 스릴러 마니아, 그 누구의 지지도 끌어내지 못해 기획 단계의 화제성이 흥행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았지만, 권선징악에서 선을 처녀형으로 악을 요부형으로 그리는 전형적 여성성의 선악 구도가 아닌 부드러운 카리스마 리더십으로 신사임당을 묘사해 사극의 진보를 이뤄냈다. 신사임당은 여성들이 남성들의 소유물 취급을 받던 조선시대에 시, 서, 화에 능한 역량 있는 문인이자 예술가이며 아이들까지 훌륭하게 키워낸 어머니다. 16세기를 살았음에도 21세기 현대사회 여성상의 상징으로 그려낸 ‘사임당, 빛의 일기’는 시청률에서 벗어나 여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 관점에서 재평가돼야 한다.       


여성이 타이틀롤을 맡은 ‘명성황후’, ‘장희빈’(KBS2, 2002년)에 이어 ‘사임당, 빛의 일기’, 세 작품의 의상을 담당한 한복 디자이너 한은희는 조선 시대의 획을 그은 운명의 여인을 각기 다른 색채로 그려내 사극 역사의 진보에 동참했다.       


한은희 디자이너는 선과 색으로 조선 사대부 여인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기품 있지만 당찬’ 이미지로 사임당을 묘사했다. 파스텔 톤을 기본으로 깊이 있는 색감을 가미해 진중한 여성 신사임당 이미지를 전개했다. 사임당에 앞서 장희빈은 비비드 톤의 선명한 색감으로 전혀 다른 여성상을 묘사한 바 있다. 그는 개인의 스타일이 아닌 작품마다의 지향점을 고려해 제한적일 수 있는 한복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세밀하게 표현한다. 신사임당 의상 역시 ‘사임당, 빛의 일기’와 배우 이영애의 시너지를 고려한 설정으로 16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진보적인 여성상을 그려냈다.   

       

이는 사임당의 한복을 만들기 전에 대본을 몇 번씩 읽고 사임당이 처한 상황과 거기서 느꼈을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그는 “아마 감독 배우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시나리오를 많이 읽었을걸요. 읽고 또 읽고. 이영애 씨가 나오는 부분은 별도로 다 기록해서 한복이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계속 봤죠”라며 시나리오를 읽고 자신의 분석을 기록한 후 끊임없이 재검토하는 자신만의 한복 의상 기획 과정을 설명했다.     

   

사극 시대극 속 의상 재현과 재해석 


‘덕혜옹주’(2016년)


의상감독 권유진은 사극과 시대극은 ‘역사가 스포일러’라는 고충 토로와 함께 99%의 고증과 1%의 허구로 완성된다며 사극 거장답게 고증의 재현과 허구로서 재해석의 황금비율을 언급했다. 물론 이 황금비율이 시대극에서는 재해석의 비중이 커진다.      


그는 “시대극은 사진이 자료로 남아있다. 그런데 사진대로 입혀놓으면 스타일이 살지 않는다. 영화 작업을 할 때마다 고증과 현실과의 경계에서 고민하게 된다. 고증을 완전히 무시하면 안 되고 그렇다고 퓨전이 되는 것은 더욱더 싫고. 고증을 따라는 하되 거기에 포인트 하나를 잡는다”라며 재해석이 극적 상황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시대극의 의상 설정에 관해 설명했다 


마셜 맥클루언은 ‘미디어의 이해 ; 인간의 확장’ 중 ‘영화 : 릴의 세계’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더 선명한 영상을 제공하면서 의상의 재현이 중요해졌음을 언급했다.      


“영화가 한 장면에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또 하나의 단면은 ‘헨리 5세’나 ‘리처드 3세’ 같은 역사 영화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서는 세트와 의상을 제작할 때 방대한 조사가 행해졌기 때문에 어른뿐만 아니라 여섯 살짜리 어린이도 쉽게 즐길 수가 있다. 엘리엇은 그의 ‘대성당에서의 살인’이 영화로 제작될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시대에 맞는 의상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카메라의 눈이 너무 정확하게 모든 것을 가차 없이 잡아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의상을 12세기에 사용된 것과 같은 기술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환영의 한 가운데 있는 할리우드는 또 이미 지난 과거의 장면을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재현해야만 했다.”      


영화 혹은 방송에서 전달되는 이야기가 제아무리 허구라고 해도 맥클루언의 언급대로 사극과 시대극에서 의상은 정제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불특정 다수를 관객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정확한 고증을 거친 재현은 사극과 시대극에서 필요충분조건일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로 사극과 시대극의 경계에 있는 영화 ‘덕혜옹주’(2016년)의 의상을 전담한 그는 99:1의 사극 황금비율을 지킬 수도, 그렇다고 재해석이 중요한 시대극에 무게중심을 옮길 수도 없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부담이 엄청나다”라며 “원판이 명확한 영화이기 때문에 원판보다 안 나올 수 있다는 경우의 수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크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덕혜옹주에서는 고증 충실성이 요구되는 사극과 재해석의 몰입도를 결정하는 시대극의 양립을 선택했다. 그는 “덕혜옹주는 고증보다 영화적 요소를 살리는 데 중점을 뒀다. 단, 덕혜의 어린 시절 궁중 생활이나 고종과 찍었던 가족사진은 100% 고증에 충실했다”라고 밝혔다.       


고증의 재현과 허구의 재해석을 적절하게 조율해 완성된 덕혜옹주는 여리지만 강단 있는 여성, 그러나 자신의 운명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거두지 못한 역사가 보호하지 못한 인물이다. 이를 위해 권 감독은 덕혜의 세밀한 감정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궁중에서의 화려한 삶이었던 조선, 집에서든 정신병원에서든 감옥이나 다름없었던 일본, 매번 좌절당하는 귀국까지 덕혜의 여정을 차분히 따라감으로써 공주도 정신병자도 아닌 불운한 시대를 산 사람에 집중했다.      


철저하게 남성 중심으로 전개되는 사극과 시대극의 특성을 거스른 영화 ‘덕혜옹주’,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고 방영돼 현대사회에서 재구축되고 있는 여성 이야기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여성은 가장 진부한 여성성을 제시해온 사극과 시대극에서 남자들의 로망으로서 처녀형, 요부형의 전형을 벗어나 진보적으로 재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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