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이상 Nov 01. 2020

Ⅱ-2. ‘사임당, 빛의 일기’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

신사임당 이영애의 무명옷

“이 어미도 네 나이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조선에서 여인으로 살아간다는 자주 답답하다고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것이야. 허나, 언젠가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 오지 않겠느냐. … 물론 밤은 길겠지. 허나, 우리 매창이가 누군가와 혼인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딸을 낳고 그 아이의 아이가 딸을 낳을 때쯤이면 해는 뜰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그 아이들의 밤을 조금씩 밝혀주면 되지 않겠느냐.”       


‘사임당, 빛의 일기’(SBS, 2017년)에서 신사임당(이영애) 딸 이매창(신수연)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꿈을 포기해야 하는지, 포부는 왜 남자들만의 것인지, 계속 깜깜한 밤이고 영영 좋은 세상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지, 묻는다. 문인이자 예술가인 사임당은 이성적으로 때로는 감성적으로 딸을 달래면서 현실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21세기 현재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라면 반기를 들 수 있는 발언일 수 있지만 당시 시대가 1500년대로 제아무리 양반가라고 해도 글을 읽지 못하는 여성들이 많았던 시대임을 고려할 때 신사임당 앞에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충분하다.     

  

이영애 의상을 전담한 한은희 디자이너 해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선과 색으로 조선 사대부 여인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기품 있지만 당찬 여성으로 사임당을 묘사했다.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고려지 사업에 매진하는 종이 공방 에피소드는 남편 그늘 아래서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가 아닌 운명에 맞서 가정을 일구는 가장이자 경영자로서 리더십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신사임당을 21세기 진보적 여성상으로 재해석했다.   

 

‘사임당, 빛의 일기’(SBS, 2017년)

    

극 중 신사임당은 천부적 재능을 응원한 아버지 밑에서 보낸 전반부의 어린 시절과 종이 공방의 성공 후 화가로서 삶을 산 후반부는 파스텔 톤으로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디자이너 한은희는 사임당 삶의 전환점이 된 종이 공방 일을 할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도구로 서민복으로 분류되는 무명옷을 활용해 극적 효과와 사실성 모두를 충족했다. 

       

가세가 기울면서 한양으로 올라온 신사임당은 집에서 마 소재 옷을, 공방에서는 무명 소재 옷을 입는다. 양반이라는 허울만 있을 뿐 가진 거 없이 고생하는 삶이지만, 사임당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아이를 키워내는 어머니이자 생계를 책임지는 실질적 가장 역할을 모두 도맡는다. 이 같은 상황에 걸맞게 이 시기는 파스텔 톤이 아닌 짙은 색으로 염색해 굴곡진 삶을 표현했다.      


그는 “한양으로 올라와서 입은 사임당의 한복은 손 마로 만든 옷이었습니다. 집에서 입는 옷이지만 기품 있는 모습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종이 공방을 시작하면서는 달라질 수밖에 없죠. 당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가 강한 시기입니다. 거친 일들을 안 해본 사람이 해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색을 강하게 썼죠”라며 종이 공방에서 굴곡진 사연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남긴 무명옷에 관해 설명했다.      


무명옷은 색감뿐 아니라 소매 폭이 좁고 가슴 밑으로 내려오는 저고리에 허리에 주름이 잡힌 치마의 한복으로 구성된다. 이는 21세기 현재 생활한복에서 선호되는 천연염색으로 색을 낸 자연 색감과 촘촘히 주름 잡힌 치마까지 세련된 디자인이 눈길을 끈다.    

   

현대적 스타일로 여겨지는 의상은 이영애 이미지와 사극과 판타지를 오가는 작품 성격만을 고려해 고증을 배제한 허구적 설정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무명옷과 천연염색은 역사적 사실성에 기반을 둔 재해석의 결과물이다. 


무명은 베틀을 이용해 평직으로 재직해 질박하고 기교 없이 소백(小白) 한 것이 특징이다. 과거에는 물레를 이용해 실을 짜 불규칙한 굵기로, 질감과 색감의 미적 특성이 한민족의 정서와 부합해 조선시대 이후에도 많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종이 공방에서 신사임당의 무명옷은 서민과 함께 하는 일하는 여성상을 표현하게 충분한 도구다.  

        

한은희 디자이너는 과거와 달리 지금은 같은 소재로 제작한다면 결코 서민복이라 할 수 없다는 비하인드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베틀로 직접 짠 무명은 귀하고 비싸다”라며 사극으로서 사실성을 위해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예뻐서 포기할 수 없었다는 속내를 전했다.   


극 중 몇 차례 변화를 거치는 파스텔톤의 고급스럽고 수려한 디자인의 한복보다 질박한 무명옷이 더 강한 인상을 남긴다. 역사에 기록된 문인이자 예술가로서 행적 못지않게 사업가 면모를 부각한 ‘사임당, 빛의 일기’는 조선시대가 강요한 이상적 여성상이 아닌 자신 신념에 따른 삶을 산 사임당의 극 중 이미지에 현실성을 부여했다.  

이전 05화 Ⅱ-1. 영화 ‘덕혜옹주’ 슬픔에 갇힌 공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