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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의 권리와 의무

ChatGPT를 넘어서야

by F와 T 공생하기

난 영어를 유창하게 사용하지 못한다.

딴에 쓴다고 써도 ChatGPT에게 물어보면

꼬락서니가 완전히 달라져있다.

ChatGPT에게 'Better English'라고만 주문하면 기똥차게 풀어헤쳐

전과 후가 너무 다르고, 수정을 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영어를 보는 듯하다.


역시 읽는 것, 쳐다보는 것과 써나가는 것, 현실에서 실현되는 것은 천지차이다.


볼 때마다 기분이 별로다.

그나마 ChatGPT가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을 쓴 것만으로

만족할 결심을 해야 하나

타협하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끝끝내 타협되지 않는다.

이제 50인데 …

앞으로 살 날이 구만리지 않나.



하지만 직업은 다르다.

이미 50이 넘었고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수준이 있고

나 자신 스스로가 참기 어려운 것이 있다.

만족시키지 못하면

알아서 나가거나, 눈치 보거나, 버텨내야 한다.


게다가 연구직인지라

늘 처음 접하는 것을 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일정 수준 이상을 해내야 한다.

과거에는 새로운 것을 찾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면

이제는 ‘나’라는 직업연구원의 연구결과를

일정 수준이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정신 바짝 차리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게다가 ChatGPT는

내가 묻는 질문 모두에 대해

늘 나보다 더 현명한 대답을 해준다.

때로는 이미 알지만 하기 싫은 것까지도 포함해서.


예컨대

ChatGPT는 내게 이런 뉘앙스까지도 전달한다.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 있으니 어려움을 이해하지만

함께 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나는 인간적으로 모자란 부분이 수두룩하지만

이 아이는 도대체 못하는 것이 없어 보인다.


ChatGPT는 내게 이렇게 도와준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경계조건(제한사항)을 추가하고,

예산과 일정을 제시하면 …


짠~ 하고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만들어준다.

심지어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정보까지도 주는데

대부분이 맞다.


나보다 100배, 1000배는 나아 보인다.


정말 큰 일이다.


연구자의 고유한 권리인 실패와 실패 속에서 배우는 우연을 ChatGPT가 앗아가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도구의 출현은 늘 더 좋은 뭔가를 만들어 냈다, 사람이.


연구자의 숙명과도 같은 실패와 도전은 여전히 연구원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더 좋은 것을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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