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Liberty by John Stuart Mill
한동안 한국에서 가장 많이 방송을 탄 어휘 중의 하나는 바로 ‘자유’다.
내 아버지는 경북 산골 출신에,
내 어머니는 더욱 산골 강원도 출신,
난 1970년대 부산 출신.
어릴 때 받은 거의 유일한 조기 교육은
반공, 지역감정,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겠다는 일념, 복종 정도다.
1980년대 초중고를 다녔으니
어릴 적 기억 속에
대통령 피격,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의 집회와 이해할 수 없는 폭력과 투쟁,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늘 강조하시던 국어선생님, 국사선생님이 어느 날 갑자기 빨갱이가 되는 것,
한글 일원화,
반공과 반일 사이의 균형,
(사촌과 목숨 걸고 한 판 붙은 것과 남에게 수십 년 노예살이 한 것 사이의 인식차이,
사실 이웃사촌과는 잘 지내도, 철천지 원수같이 싸운 가족과 일가친척과는 척을 지는 것들을 흔히 볼 수 있으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이제는)
이해하기 힘든 많은 일들을 겪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성가시게도
눈에 보이는 것을 모두 사실로 받아 드리지 않고,
피부로 와닿는 위험을 회피하지 않고,
심지어 궁금해하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다.
어떤 문헌에는 정치적인 혹은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들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유전된다고 하기도 하는데
적어도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난 돌연변이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난 쓸데없이 몇 살인지, 어디 출신인지, 돈이 많은지 이런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나이가 같다고 ‘친구’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50이 넘은 지금도 어릴 때와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다.
자유로운 이성을, 변화와 혁신을, 정직과 성실, 협력을 최우선으로 한다.
패거리를 따라 살아본 적은 없는 듯하다.
이것은 나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유의지로 보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부르짖는 ‘자유’라는 것이 내가 아는 자유와는 사뭇 다른 것 같아
그들이 말하는 ‘자유’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기인된 것이지 알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짧은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감히 Liberty를 찾아봤다.
한 장도 제대로 넘기기 어려울 만큼 지겹다.
토요일 아침이니 노곤하기도 하고 계속 John Stuart Mill의 초판에 가까운 100년도 더 된 활자본에 연신 인사질이다.
불경스럽기 짝이 없다.
John Stuart Mill(1806~1873)의 On Liberty(1859)는 Queen Victoria 시대에 개인의 자유, 제한된 정부, 표현의 자유, 폭정으로부터의 보호를 주장하였다.
특히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권력자 혹은 폭정의 제한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할 수 있다.
John Stuart Mill은 서두에서 밝히기를 개인의 ‘의지’에 의한 자유에 관한 에세이가 아니라 권력의 제한에 관한 것이라 분명히 했다.
이를 통해 세계적으로 미국의 자유, 인도의 자유, 제국주의시대 이후의 민주적 체제, 세계 연합 인권 등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980년대, 90년대를 이어오며 학교 교육을 받은
나는 ‘자유’는 사회적 공공선과의 ‘균형’이라 배웠는데 이 놈의 ‘균형’이 현실사회에서는 도대체 지켜지는 것을 보기가 너무 어렵다.
당연한 것이 칭찬받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런 바보같이. 원래 그런 세상이었다.
어느 대학의 사회학 연구 논문을 보면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물신화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적 욕망과 스노비즘(snobbism)!
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2236786
시험 엘리트가 공공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이익에 줄 서서 속물적인 ‘의지’를 실현할 때, 공공선에 맞춰 통제되어야 할 정치적 ‘자유’는 ‘폭정’에 의해 짓밟히게 된다. 특히 표현의 자유가 없을 때는 더더욱 위험해진다. 또한 과학적 사고, 비판적 사고는 위협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에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저 자유에 관한 책은 1850년대에, 호주에는 1880년대에 출간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에 가깝다. 영미권의 200년과 한국의 30년(1987년 이후)을 비교한다면 우리의 발전 속도는 실로 놀랍다.
앞서 언급한 물신화한 나르시시즘적 욕망과 스노비즘은 한국에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보수적인 왕권사회에서 200여 년에 걸친 민주제의 성숙과 왜곡의 과정에서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일제, 독립, 전쟁, 독재, 산업화와 같은 극복 과정에서
피로써 민주주의를 실현, 이행하는 와중에
우리 사회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그들의 반역과 부패의 현대사 100년.
실로 엄청난 대한민국이다. 100년의 역사가 오늘 또다시 꿈틀 된다.
우리 모두는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승리할 것인가? 패배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