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구가 자동으로 막힌다.
호주에 정착한 것은 아니고,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 1년을 살고 있다.
순수 한국 교육을 받고
무기체계를 만드는 정부연구기관에서 일하다
서른 즈음에 독일에서 2년 가까이 살다
살아있는 이성이 무엇인지를 배웠으나
한국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정도가 아니라 해를 줄 수 있음을 느끼게 되고
재교육을 받고는 떠나
새로운 정부연구기관으로 적을 옮겨
연구개발의 주역이 되어보고자 했으나
연구보다는 문서작업과 사람에 치여
마음에 중병을 앓아왔다.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
호주에 온 이후에도
수개월 몸을 가눌 힘도, 가누고 싶은 마음도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
하지만 쉼의 효과는 어마어마하다.
특히 이곳의 자연과 사람은 내 기력과 마음을 되살리기에 충분히 놀랍고 따사롭다.
살아가는 곳곳의 모습들은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상향에 맞닿아 있어 보여 더더욱 놀랍다.
선거가 치러지는 모습,
선거가 끝난 뒤 이뤄지는 쫑파티,
선거를 통해 공복을 뽑고,
수고스럽지만 굳건한 민주적 제도를 잘 실천했음에
서로를 격려한다.
이겼으면 더 좋았겠지만
진 경우라고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속들이야
부글부글할지 말지는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이들은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내 평생 다시 보지 못할 진기한 광경이다.
내가 사는 자그마한 방 하나짜리 아파트에서 화재경보가 떴다.
난리도 아니다.
삑, 삑, 삑, 대피, 대피, 대피.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배할매, 아재아지매, 아이어른 할 것 없이 죄다 꾸죄죄한 폼을 하고는 엉거주춤 아파트 밖으로 나온다.
내가 와 있는 호주국립대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화재경보가 떴다.
무심코 평소에 다니던 길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문이 막혀있다.
뒤를 돌아보니 화재경보가 발생하면 일상적 경로가 차단되고,
별도의 방화로가 제공되는 모양이다.
아무런 치장이 되어 있지 않은 안전한 방화통로를 따라 내려가면
완전히 안전한 외부출구가 나와 널찍한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 상황이 진전되기를 기다리다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파트에서 여러 차례 동일한 화재경보가 발생했을 때도 경험했지만
학교에서 보고 나니 더더욱 특별해진다.
화재가 발생하면 평소와는 다른 방화통로를 통해서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건물이 지어질 때부터 고려된 것이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았다면 민간이 이렇게 했을 리가 있겠는가?
또한 내가 처음 여기 학교로 왔을 때를 상기해 보면,
이론교육, 심화교육, 현장교육까지 받아야만 실험실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는 안전관리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
두 번째는 안전관리의 시작은 바로 나 스스로라는 것,
세 번째는 정확한 물리, 화학적 지식을 알고 적절히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네 번째는 약속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도록 시스템이 강제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기면? 불행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고,
내가 어기는 것을 방기 하면 관리자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고,
그럼 나는 나가야 한다.
위험의 외주화?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아 보인다.
이게 선진국이다.
하지만 걱정이 앞선다.
30살에 경험한 선진국과 중진국 한국사이에서 섣불리 이성을 앞세우면 망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뒷방에 갇혀 시름시름 앓다 고사된다.
이제 50살 넘었다고 다를까?
20년 전의 한국과 지금은 다르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반지성적 패거리 문화, 전문가 집단의 기득권 선민의식, 공복은 사라지고, 기회주의가 판을 친다.
한국의 시스템은 척박하고, 사람은 천박하다.
플라톤의 이상사회에 대한 기대를 통해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철학적 왕권, 수호자 엘리트, 성실한 생산자들에서 대한민국은 절반의 성실한 생산자만 있다.
철학가 왕권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 제어되지 않는 무차별적 폭력은 수없이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려 하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따른 개인의 자유와 공권력의 제한, 표현의 자유 사이의 균형은 한국사회에서 이미 무너져 내렸다, 사실 원래부터 없었다고 봐야할 듯 싶다.
제한된 몇몇에 그치지 않고 독재와 독점을 꿈꾸는 그들에게 줄을 대어서라도 지위를 차지하려는 샐 수 없이 많은 전국 곳곳의 그들에게 공정과 공공의 가치는 이미 없다.
심지어 반지성적 침묵과 양비론은 지금은 고통을 미래에는 더 큰 고통과 진통을 겪게 할 것이 틀림없다.
애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따르면 한국경제는 부를 추구하는 개개인의 이기심이 아닌 권력에 의한 경제적 자유의 부패 즉 정부의 과도한 지위 권한 행사에 의해 시장을 조작하고, 경쟁을 제한하며, 부패에 직접 관여하게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대표적인 것이 주가조작이다.
민주공화정과 다양성이 굳건히 지지받는 사회, 의사결정이 투명하게 관리되고, 추적되는 사회, 독점 전문가 집단이 아닌 시민, 납세자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
이것이 바로 영속가능한 선진 고소득 민주주의 국가다.
과학기술조차도 패거리 지어 정치질을 해야 하는 예산 전쟁에서 지극히 당연한 지적 행위가 설 자리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천박한 선택을 할 것이다.
더 이상 지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고,
적당히 안팎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적당히 일 할 것이고,
적당히 좋아 보이게 만들 것이고,
더 좋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고,
관리자로서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연구자로서도 더 이상 국가를 위해서는 일 하지 않을 것이고,
내 은퇴, 부의 축적, 경력의 사다리가 될 수 있는 것들 외에는 관심두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잘못된 일이라도 절대로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더 열린 시장을 지향할 것이며,
한국보다는 미국, 영국, 호주, 유럽, 심지어 중국 등
평생 모은 지적자산 모두를 나만을 위해, 타국을 위해 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다시 실패하리라.
여전히 지속성을 이야기할 것이고,
판단의 근거를 물을 것이며,
이왕이면 도움 되는 것을 찾을 것이고,
동료들을 설득하고, 욕먹을 것이며,
산업현장과 책상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노력할 것이고,
내일 더 좋아질 수 있다면 기꺼이 나를 희생할 것이고
인의예지에 맞지 않다면 스스럼없이 손을 들어 따져 물을 것이고,
세계시장에서 이기는 것을 만들기 위해 혼신을 다할 것이며,
내 가족, 후손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을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만드는가?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 예측할 수 있고, 높은 확률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고수익, 선진 민주주의 국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