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삶의 흔적들

찌꺼기 버리기 결심

by F와 T 공생하기

열심히 새로이 살 집을 찾는다.

거의 서울 전역을 뒤진다.

하나 같이 비싸다.


도심에 가까우면 그에 따른 시간을 버는 이득이 있기에 무조건 더 비싸진다.

도심에서 멀면 그 시간을 몸으로 때워야 하는 만큼 싸진다.


이 하나마나한 쓸데없는 말을 받아들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지역, 지하철, 편의시설, 기피 시설, 경제성 등.


집을 줄여야하니 짐 역시 줄여야 하지만 고통마저 따른다.


가끔 들르는 아들 생각도 하고, 아들이 두고 간 책상, 침대, 추억 돋는 수없이 많은 오래된 가족의 역사들은 물론이고, 연중 한 번도 쓰지 않은 식기들, 기구들이 수두룩하다.


쓸데가 아예 없지는 않다. 가끔, 아주 가끔 스스로가 소유자임을 기뻐할 때만 소용을 다한다. 그럼에도 이를 위해 방 한 칸 혹은 그 이상을 수억원을 들여서 고이고이 모셔야한다?


내 성정상 참을 수 없다. 언제 해야해?

필요하다면 지금 바로해야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한 번도 보지 않았을 전공서적, 한참이 지난 보고서들, ...


여기에 짐을 두고 자리를 옮긴 선배의 짐은 차마 함부러 쉽게 버리진 못한다. 심지어 감정의 찌꺼기를 위무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실용적 가치가 없는 쓰레기에 가까워 보여도 말이다.


모두들 짐 속에 파묻혀 살고 이 쓰레기를 감추기 위해 가구를 버리지 못한다. 그냥 버리면 될 것을 ...

버리지 못해 공간이 부족하다며 죽는 소리들을 해댄다.


마치 다 썩어서 악취가 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다.


얼마전 사무실을 옮기니 여지없이 선배가 남긴 쓰레기로 가득차있다. 나 보다 더 늦게 들어온 후배와 함께 결심했다. 이 정도는 버려도 비난 받지 않을 것이라 서로의 눈빛을 보며 확신에 차 그 즉시 쓰레기장으로 보내버렸다. 사실 묻는 시늉은 했고, 선배도 딱히 미련은 없어보였기에 가차없이 버렸다.

덕분에 내게 꼭 필요한 공간과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만 지킨다면 무엇을 남기고 어떤 생을 즐길 것인가?


내가 죽으면 내가 쓰던 자리를 남게 되는 배우자가, 자식들이 치우게 된다. 당장에라도 갑작스런 죽음을 마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 하루도 정갈하게, 깔끔하게 정돈된 채로 살다 가고 싶다는 생각에 이른다.


미니멀리즘.


사실 호주에서 휴가를 보내며 느낀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 많은 것을 소유할 필요는 없다'는 자각이다.


아침에는 달걀 토스트 하나, 야채 조금, 우유에 씨리얼, 커피 한 잔이면 족하고,

점심엔 아내와 함께 미술관이든 공원이든 나가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과일과 와인 한 잔,

저녁엔 남대문이나 을지로의 오래된 집들에 들러 세상구경삼아 한 끼 한 끼의 축복을 누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때때로 한강도 가고, 남산도 가고, 북한산 자락에도 가고,

한강작가의 서점에 가서 그녀의 서평이 어떠한 지 보며 감탄하고, 노무현재단에 들러 앞서가신 분의 독서기에 놀라기도 하고, 헌책방에 가 철 지난 여행, 철학, 시집 책 구경도 하다, 가끔은 도심 속 쇼핑센터에 들러 유행 속 내 자신을 담아 보기도 하고, ...


많은 옷, 많은 소품, 좋은 차를 거느리기 위해 너무도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든다. 심지어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할 것들이 어느새 내게 주인행사를 하기까지 한다.


굳이 내 집에 가둬두고 나만의 것으로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운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19화귓불을 당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