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벌거숭이가 세상을 마주하는 법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내 인생의 어느 부분을 조각내어 빼버리고 싶은지 기억하기 어렵다.
하나하나 집어서 빼버리기에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인생이 과연 슬프기만 했을까?
내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조작된 기억이 아니라
온 가족이 분명히 기억하는 내 유년기는 어찌 보면 내 인생의 황금기였을지도 모르겠다.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로 온 동네를 제패했고, 너무 바빠 해가 지기 전에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놀다 지쳐 집으로 돌아와 꿀맛 같은 엄마가 해주신 밥을 먹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과 같은 상투적 표현이 뜻하는 것과 같이
이미 기절한 듯 잠 속에 빠져들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이내 또래 아이들과 함께 길을 나선다.
개구리 잡으러, 메뚜기 잡으러, 잠자리 잡으러.
어느 날엔가는
동네 삽자루 모두를 들고,
땅굴을 파고,
토굴을 짓고,
아이들을 모아
그렇게 놀러 다녔다.
어느 날부터인지
아버지의 걱정이 시작되었다.
맞다.
학교를 마치고 집을 바로 오지 못한 바로 그날이었다.
구구단을 외지 못해
한참을 반복하다
결국 실패하고는
돌아온 바로 그날.
이후 4살 많은 형을 따라
꼼짝없이 한글을 공부해야 했고,
한자 쓰기를 해야 했고,
구구단을 외워야 했다.
형은 나를 가르친 덕에
아버지께 칭찬을 받고,
용돈도 받았으리라.
나 역시 바보를 벗어난 수고로
사탕 한 알을 받았을 것이다.
어쩐 일인지 이후 나는 제법 급성장을 했던 모양이다.
글을 보면 바로 읽고, 기억했고,
당시의 산수 교과서를 보면
배우지 않아도 혼자서 풀어낼 수 있었다.
덕분에 갑작스러운 눈총들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저축 장려 와중에
돈이 없어 저축을 못함에도 매번 혼이 났던 기억이 난다.
자유롭게 지내던 나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습능력과 자본의 영향권에
점점 접어들게 되었다.
딱지치기 대장은 쓸모가 없어졌고
장마 후 내가 즐기던
물길을 바꿔 풀(pool)을 만들며
물고기를 가두며 놀던
나의 놀이를 함께 할
친구들이 모두 사라져 갔다.
조용필, 마이클 잭슨,
나이키 신발이
아이들 사이의 대화 주제가 되었고,
오락장 게임이 제일가는 놀이가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음메, 꿀꿀, 꼬꼬댁이 전부였고,
고무신에서 막 바뀐 메이커 없는 운동화에 감지덕지했던 우리 집이었기에
게임할 돈이 없는 내게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도시에 살던 친구들은
집에 한 번 오더니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왕따나 뭐 그런 것으로 고생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남의 시선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친구들이 착했다.
아주 가끔 매우 노골적인 교사들만 나를 괴롭혔다.
중학교 이후는
더 심해졌다.
또한 아버지가 가르친 나의 지적 능력과
낮은 경제력 사이의 크나 큰 괴리에 따른 혼돈은 꽤나 헤쳐 나오기 힘들었다.
아버지의 선견지명과 특단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형의 특훈은 나를 몰라보게 높은 경지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빈곤한 삶을 견디지 못해
학비가 지원되는 특수고등학교 진학을 원하는 내게
형의 따끔한 응원은
결국 나를 유수의 대학 박사학위를 가진 와이트 칼라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좋은 자세와 태도도 배우지 못했다.
늘 말하지만 천둥벌거숭이 그 자체였다, 난.
대학은 내게 무한한 자유와 버거운 책임, 그리고 좌절을 가르쳐줬다.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라면 한 그릇, 밥 한 공기로 하루를 버티고, 비틀거리며 학업을 이어갔다.
그 와중에도 방학이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술은 술대로 마셨다.
가난에 지쳐 세상의 모든 짐을 지 듯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했다.
일어나면 친구들이 밀어 넣은 모텔이거나, 잔디밭이거나 그랬다.
심지어 이 술버릇은 마흔까지 이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시절 그 친구들은 정말 보살이었다.
아무리 힘든 하루를 지나더라도 영어책은 꼭 옆에 챙겨두었다.
힘들어 지쳐 도서관에서 쓰러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숙면을 취하더라도 영어책을 베고 잤다.
아주 잘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위안거리가 되었다.
한글책을 읽으면 마치 가난과 절망 속에 갇힌 느낌이라면
영어책은 나를 자유의 나라로 인도해 줄 것만 같은 편안함을 주었다.
덕분에 영어를 꽤 잘하는 준비된 공대생이 되어 있었고,
부족한 전공성적에도 끈기와 성실함을 영어성적으로 증명하고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대학원에 턱걸이로 입학했다.
하지만 절망 그 자체였다.
좋은 학교,
좋은 교수님,
좋은 동년배,
좋은 선배들, …
그럼에도 가끔 걸려오는 전화 넘어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학업을 이어가기 어렵게 만들었다.
환청까지도 들리곤 했다.
책 속에는
어머니의 울음소리와
아버지의 고함소리,
싸움 뒤의 전쟁 같은 아수라장만이 떠올랐다.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는 이 모든 어려움을 가혹하리만큼 악화시켰다.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일하고를 반복하다
보름을 입원해야 하는 지경까지 갔다.
처음 3일 동안은 한 번도 깨지 않고 내리 잤다.
그리고는 뇌에 이상이 있어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냥 퇴원했다.
지금까지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다행히도 졸업을 했고,
직장을 가질 수 있었다.
재미난 곳이었다.
내게 자부심을 줬고,
사력을 다해 존재를 확인시켰다.
많은 이들과 지내며
삶의 재미와 다채로움을 안겨줬다.
이후로 다시 대학원에 진학했고,
역시나 좋은 학교,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좋은 열린 관계와 터전은 누구에게나 최고의 텃밭이 되고,
열매는 볼 줄 알고, 가꾸고, 먹는 사람의 몫이다.
역시나 세상에서 가장 쉽고 정직한 것은 공부하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글을 쓰고, 정리하고, 이해하고, 되뇌며 반복적으로 훈련하고, 증명하고,...
휴가 동안 새삼 느끼는 것은 내가 이 일을 꽤 좋아하는 것 같다. 그간의 괴로움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정도로.
사실 너무 가까이 가면 여전히 아프고, 눈물 흘리며, 괴롭지만
적당히 떨어져 보면 내 인생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세상에 아무리 험한 일이 많더라도 어차피 남의 일이고, 내 손가락의 가시가 제일 아프고, 급하다.
그럼에도 중국의 작가 ‘위화’가 그린 ‘인생’의 주인공이 겪은 파란만장한 인생과 비교한다면 … 설사 그것이 과할지라도..
또 아니라고 해도 뭐 어쩌랴.
매 순간
새로운 것, 재미난 것을 반기고, 놀라고, 즐거워하는 시골 아이로서
외롭고 고독한 도시의 아이로서
하루하루의 고단과 긴장을 산 자가 누리는 신의 은총으로 여기는 도시의 어엿한 성인이 되고자 하는
나는 오늘도 여전히 천둥벌거숭이다.
더 고개 숙이고, 더 친절하고, 더 조심해야 하지만
단순하고, 거칠며, 두려운 줄 모르고 함부로 덤벙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