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임을 인정할 시간

by 해사

믹스 커피가 입에 딱 맞으면 진짜 어른이야.

아이를 낳으면 그 때 어른이 되는거래.

또 누군가는 대출이 생기면 어른이라고도 하더라.


어릴 적 내가 상상한 어른은

새벽에 일어나 이불을 단정히 개고

창문을 열어 아침 공기를 들이킨 다음

커피를 내리고, 한 손엔 커피, 한 손엔 신문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른이 된지 20년이 훌쩍 넘은 나는, 지금도 물론 여전히 어른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긴 한다. 아이가 깨워서.

이불정리도 하긴 한다. 부자들은 다 이불 정리를 한다고 하길래 일말의 희망이랄까.

한 손에 커피도 있다. 안마시면 제 정신이 아니니까.

신문은 없다. 대신 중독자처럼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사람은 있다.


이유야 어쩄든 겉모습은 얼추 비슷하다. 그런걸로 해 두자.

가끔 궁금하다.

어릴적 상상한대로 살고 있는 사람도 있을까?

나는 나이로는 분명 어른이 된지 한참인데,

사실 어른 흉내를 내고 살고 있는건 아닐까 싶을 때가 많다.


나만 믿는 아이가 친구와 다퉜다며 울먹이며 찾아올 때.

이젠 나를 챙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내가 챙겨야 하는 사람들만 가득할 때도,

어머님, 이모 소리가 자연스런 윗세대가 되어버렸을 때.

복잡한 일을 앞두고 의지할 곳 없이 걱정하다가도,

어쨌든 결국 또 해내고 나면,

나는 여전히 어른 흉내를 내며 살아가고 있구나 싶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은 내가 애 같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20년간 어른 흉내를 내고, 어른 취급을 받으며 살아보니 어렴풋이 어른이 뭔지 알 것도 같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마음 속으로는 발동동 걱정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론 티 내지 않고, 커피 한 모금 넘기며

에라 모르겠다 그냥 하자. 하고 움직이는 사람.


혼자 결정하고, 감당도 혼자 하고

누구한테 물어보기도 애매한 일들을

매일 끊임없이 처리하는 사람.

그리 근사하진 않지만

이런저런 걱정들을 그럭저럭 잘 숨기고 살아가는, 제법 기특한 사람.


20년이 지나서야 대충이나마 어른이 뭔지 알겠는데,

이제는 흉내내는 것 말고 진짜 어른이 되어야한다니.

이번엔 또 몇 년이나 걸릴까.

에라, 모르겠다. 일단 커피부터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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